▲ 김용권 시인

뻐꾸기는 우리나라에서 흔한 여름철새이다. 보리가 퍼렇게 필 무렵, 뒷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소리는 정겹다 못해 숙연해지기도 한다. 어린 시절, 들판에서 한참을 뛰놀다가 뻐꾸기 소리가 들리면 하릴없이 뻐국, 뻐꾹 따라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도회지에 둥지를 틀고서 그 소리를 듣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아스라한 추억의 소리, 그 소리를 잊어버린 게 한둘일까? 고향을 떠나 도회지로 흘러들어 온지도 어언 수십 년이 넘었어버렸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벌써 정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오래 전, 회사창립기념일 선물로 받은 것이 뻐꾸기 시계였다. 뻐꾸기시계는 90년대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던 고급선물이었다. 고급스럽기도 하겠지만 고풍스런 모양에 많은 사람들에 인기를 받는 품목이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뻐꾸기 울음소리가 그때부터 다시 집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쪽 벽면에 멋진 장식처럼 걸려서 집안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아니 꼭 뻐꾸기가 둥지를 틀고 사는 나무집 같은 정겨운 모습이 된 것이다. 때만 되면 배고파 우는 아이처럼 그 소리는 세상을 깨우고 있었다.

시간은 아무리 돌고 돌아도 진부하지 않다. 한 치의 틈도, 오차도 없이 그저 돌기만 하여도 새롭고도 창조적인 시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영혼의 태엽을 감아 돌리는 시계의 종류는 많이 있다. 시계는 기계로 동력을 만들어 움직이는 것과 건전지 등을 통하여 움직이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 종류에는 일상적으로 벽걸이시계, 손목시계, 탁상시계가 대표적이며, 괘종시계, 모래시계, 물시계, 해시계, 알람시계 등이 있는데 요즘은 가장 보편화된 것이 디지털시계이다.

시계는 정확성이 생명이다. 그러나 시계가 없던 근대이전의 시간에는 불분명한 느낌이나 소리로 가늠하기도 했다. 조선의대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 새벽에 우는 닭울음소리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기도 하였다. 시계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수작업으로 생산되는 것이 부유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 초 미국시계 제조사 부르바로 인하여 대량생산과 규격화가 이루어져 일반 대중들도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얼마 전 끝난 평창동계올림픽 선수들의 기록을 보면서 대한민국이 열광한 적이 있다. 선수들의 기록이 분, 초를 다투는 촌각에서 시계의 정확성과 그 정밀성에 감탄하였다. 가상시간이 현실화 되면서 선수들의 열정과 땀의 모습들이 시간으로 환치되는 것에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뻐꾸기시계는 추가 달려있어 째깍, 째깍 돌아가지만 뻐꾸기 울음은 태엽으로 감아야 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을 깜빡하고 감아 놓지 않으면 뻐꾸기는 나와서 울지 않는다. 게으름은 금물이란 것 또한 일깨워 주는 것이다. 지금은 흔해빠진 시계이지만 그때는 대단한 선물로 아름다운 추억까지 선사하고 있다. 그러나 급변하는 사회에서 흔하디 흔한 시계방 점포가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어쩌다 시계방 앞을 지나가면 안에 걸려 있는 고풍스런 시계들이 한 시대를 건너온 유물같이 흔들리고 있다.

시계는 시간을 감각한다. 무한히 돌고 도는 시간의 무한성에 유한성을 한정하는 것이다. 감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실감케 하는 것이다. 시계는 시간을 감각하고 사람은 그 시간을 감각하는 것이다.

이 감각의 시간 속에는 생성과 소멸의 냄새를 풍기며 미래를 감아 당기고 있는 것이다.

뻐꾸기시계의 울음이 사라지고 괘종시계 울림이 사라진다 하여도 추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릴 적 뒷산에서 들려오던 뻐꾸기 소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들판에는 보리가 누렇게 피고 녹음은 우거질 것이다. 잊었던 뻐꾸기 소리도 돌아올 것이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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