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춘수선생 유품전시관 입구.



통영 포구에 자리 잡은 문학관
가치·이념 거부했던 시인의 세계

고향 그리는 산문에선 가슴 속살 보여
만년에 참여한 정치, "아마도 어색했을 것"



땅으로 귀양 온 천생의 시인. 투쟁보다 화해, 고통보다 안정, 탐구보다 신앙을 추구했던 자유인 김춘수.
 
갓 들어온 고깃배가 풍요로움을 선사하는 통영 포구에 자리 잡은 김춘수 문학관은 딱딱한 콘크리트 건물에 들어서 있었다. 한려해상국립공원 동부사무소로 사용하던 5층 건물 입구에는 '김춘수유품전시관'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선생 대표작 꽃.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면 대표작 '꽃'의 전문이 걸려있다. 붉은 꽃잎 그림 속에 쓰여진 시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토록 아름다운 꽃도, 자신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을 뿐"이라고 읊었을 만큼 도도했던 시인 김춘수. 그런 성품 때문에 '절대 순수'를 지향했다는 평가가 따라 다녔는지도 모른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아픔을 함께 하거나, 자연과 생명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던 여느 시인과 전혀 다른 세계를 추구했던 김춘수가 살다간 모습을 보여주는 연보 옆에는 "김춘수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지만, 항일운동이 기질에 안 맞는 것을 알고 많이 좌절했다."는 글이 적혀 있다.
 
하지만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 졸업을 불과 몇 달 앞둔 1939년에 "일본인 담임교사가 마음에 안든다"며 자퇴서를 냈고, 도쿄 유학중이던 1942년에는 "일본 천황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는 대목에선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950년, 남과 북이 살육전을 벌였던 6·25전쟁을 스물여덟 살 청년의 눈으로 지켜보았던 시인이 모든 가치와 이념을 거부하면서 절대 순수를 추구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 문학관 앞으로 펼쳐지는 통영 포구.

전시실 오른쪽 벽면에는 시인이 태어나서 자란 통영항 전경을 담은 대형사진이 걸려 있다.
 
"요즘도 나는 대낮 길을 가다가 문득 갈매기 우는 소리를 듣곤 한다. 물론 환청이다. 바다가 보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 고향 바다는 너무 멀리 있다."
 
사진 아래 적혀 있는 산문에선 시인이 마음속 깊이 감추어 두었던 속살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자신의 감성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 '무의미의 시'를 추구했던 시인이지만, 삶과 문학의 모태가 된 고향 앞바다에 대한 그리움만은 감출 수가 없었나 보다.
 
전시실 2층으로 올라가면 시인이 사용했던 생활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부자리가 덮인 침대와 옷가지가 걸려 있는 안방, 응접실에 놓인 탁자와 소파 등이 윤택하게 살았던 시인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1970~80년대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 부인에게 보낸 엽서가 이국 취향의 정서를 더해준다.
 
그토록 여유 있는 삶을 누렸던 시인이었기에, 절대 순수를 지향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고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는지.

▲ 시인의 세계를 알려주는 실내 전경.
▲ 유럽에서 아내에게 보낸 그림엽서와 육필 원고(왼쪽). 김춘수가 사용했던 유품들. 전혁림 그림이 이채롭다.

혹자는 묻는다. 그토록 가치와 이념을 거부하면서, 순수문학만을 고집했던 시인이 어떻게 신군부가 주도했던 전두환 정권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을 역임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시인의 후배이자 동료였던 김종길 전 고려대 교수가 대신 해명했던 글이 전시실 안쪽 걸려 있다.
 
"가도 가도 세상은 부끄럽기만 하더라"고 친일 시인 서정주가 고백했던 글을 인용하면서 적은 글이다. 
 
"(아마도 순수시인 김춘수에게) 세상은 가도 가도 어색했을 것이다."

김해뉴스 /통영=정순형 선임기자 junsh@


*찾아가는 길 / 경남 통영시 해평5길 142~16.
관람 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 매주 월요일 휴관.
055-650-2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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