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거치며 존경의 대상으로
일제강점기 진해 주둔 일본 해군
통영 충렬사 참배 연례행사 가져



가끔, 궁금할 때가 있었다. 임진왜란 중 일본군과 20여 차례 전투를 벌인 이순신. 그는 분명 조선의 영웅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긴 이순신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시선은 어떨까?
 
최근 출간된 <일본인과 이순신>은 어쩌면 이 물음, 혹은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이라 할 만하다.
 
이 책의 저자는 진해에 주둔해 있던 일본 해군의 통영 충렬사 참배가 진해 요항부(要港部)의 연례행사였다고 전한다. 일본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로(1923~1996)의 표현을 빌리자면, 메이지 해군 장교들 사이에서 이순신을 공경하며 두려워하는 현상이 생겨났다는 것. 진해에서 통영까지 거리는 약 40㎞. 진해에 근무하는 일본 해군들이 육로를 이용했건, 선박을 이용했건 당시에는 한나절이 족히 걸렸을 충렬사를 일부러 찾아 그들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옛 장군인 이순신에게 제사를 올린 사실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적어도 메이지 시대 일본 해군들에게 이순신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책은 메이지 시대 해군 장교가 러시아 발트 함대와의 결전에 나서면서 이순신의 혼령에 자신과 일본 연합 함대의 승리를 기원한 사실도 있다고 전한다.
 
한 대목 더. 19세기 중반 일본 에도시대에 출간된 <에혼조선정벌기>에도 용감무쌍한 이순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흡사 삼국지의 장비나 관우처럼 보이는 한 장의 그림엔 단기로 북쪽 오랑캐를 무찔렀으며, 전라 수군절도사로서 귀갑선(거북선)을 만들고, 충용으로 가장 앞섰다는 등의 설명이 붙어 있다.  그렇다면 일본인과 메이지 해군 장교들은 이순신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그 출발은 1695년 일본 교토에서 <조선징비록>이 출간되면서부터로 보고 있다. 이후 1892년, 조선에 측량기사로 왔던 세키 고세이가 이순신을 다룬 첫 전기물인 <조선 이순신전>도 크게 작용했다. 세키 고세이는 이 책에서 이순신을 영국 해군 영웅 허레이쇼 넬슨과 견주어 설명한다. 일본의 측량기사가 쓴 첫 이순신 전기가 발간된 지 10년 후 해군 전사(戰史) 전공의 현역 해군 장교가 쓴 이순신에 관한 연구논문(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이 처음 나왔다. 이는 메이지 시대 일본 해군이 옛 적장인 이순신을 연구하고 이를 장교들에게 공식적으로 가르쳤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1945년 8월 이후에는 학자, 소설가, 교육자 등에 의해 이순신이 알려졌다. 특히 1960대 말 시바 료타로가 한 주간지에 연재한 칼럼과 이를 묶은 단행본을 통해 보통의 일본인들도 자연스럽게 이순신을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980년대 초부터 이순신의 활약상이 일본의 각급 교과서, 참고서 등에도 실리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 이순신 관련 기술은 1980년대보다 더 상세해졌다. 7~8종에 달하는 중학교 검정교과서 중 일부는 이순신을 언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교과서와 참고서가 다루고 있으며,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과 일본에선 귀갑선이라고 부르는, 거북선 등의 사진이 설명과 함께 실려 있는 경우가 많다.  책은 일본인들이 이순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소개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살아있을 때 어떤 일본인과 접촉하고 그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노량해전(1598년)에서 전사하기까지 이순신은 분명 일본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300여 년이 지나서 그 악연은 일본해군의 옛 적장에 대한 존숭으로 바뀌었고, 400여 년이 지난 현대에 들어와서는 일본 교과서에 그의 활약상이 소개되는 등 예상치 못한 현상으로 반전되어 나타났다. 지난달 28일은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이었다.

부산일보 /정달식 기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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