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에는 그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개인의 희로애락에서부터 한 나라 한 민족의 큰 염원까지도, 따라 부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 노래가 아닐까.
그 노래에 자신들을 다스릴 참 주인을 맞고 싶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노래이며 깊고도 넓은 시다. 까마득한 고대의 김해에서 그런 노래가 불려졌다.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우리 시가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집단 무가인 '구지가(龜旨歌)'이다.
11일 수로왕릉 숭선전에서는 추향대제를 올렸다. 가락국의 수로왕에서 9대 숙왕까지 가락국의 왕들을 기리는 추모행사인 숭전전 제례는 경남도 무형문화재 제 11호이다. 춘향대제는 음력 3월 15일, 추향대제는 음력 9월 15일에 각각 거행된다. <김해뉴스>는 추향대제를 맞아, 수로왕을 맞이하는 노래인 구지가가 불려진 구지봉을 찾았다. 구지가를 새긴 비석 '영대왕가비(迎大王歌碑)는 구지터널 앞, 허왕후릉을 바라보는 도로변에 서 있다. '영대왕가비'는 왕을 맞이하는 노래를 새긴 비석이라는 의미이다.

▲ 한시 형태의 '구지가'가 새겨진 '영대왕가비'의 앞면

거북 머리 내미는 행위는 삶과 봄, 부활 등 상징 신령한 임금 맞은 탄강설화 배경 

구지가는 고전문학 수업을 통해서도 가르치고 있어,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의 탄강설화와 함께 전해지는 구지가는 현재 4구체(四句體)의 한역가(漢譯歌) 형태로 전해진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놓아라. 만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구지가는 문헌에 나타난 가장 오래된 우리 시가로, 아직도 학계의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그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닌 노래이다.
 
어린 시절 대성동에서 자란 박성수(40·부산 화명동) 씨는 동네 형들과 함께 놀던 정겨운 놀이터였던 구지봉이 그 유명한 '구지가'의 현장임을 알았을 때 뿌듯했던 학창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고등학생 때 구지가를 배우면서, 어릴 적 내가 놀던 그곳이 우리 고대문학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시가가 태어난 곳이라는 걸 알았다. 고전문학은 어려웠지만, 구지가만큼은 지금도 생각난다."
 
인제대학교 엄국현(한국학부) 교수는 "거북이 머리를 집 속에 집어넣는 행동은 죽음, 겨울을 의미한다. 반대로 머리를 내미는 것은 삶, 봄, 부활을 상징한다. 삼월 삼짓날, 거북이 머리를 내놓는 것은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는 것이며, 죽었던 생명이 다시 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와 같은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사가 대왕맞이 의례일 것이다. 고대의 의례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죽음을 극복한 삶을 기뻐하는 고대인의 종교였다"고 구지가의 의미를 설명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수로왕 맞이하는 우리 시가 중 최고 집단요 구지가 새겨
1986년 구지봉 입구에 비석 건립

비석은 1986년 12월 28일 세워졌다. 오석(烏石)으로 만든 비의 전면에는 한시 형태의 구지가가 새겨져 있다. 비의 후면에 새긴 비음기(碑陰記;비의 뒷면에 쓴 글)는 수로왕의 탄강설화와 비를 세우던 당시의 사실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 비음기를 통해 고대 가락국의 건국과 비를 세운 배경을 알아보자.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다음과 같이 전 한다. 때는 서기 四二년 三월 삼짓날, 이 지방의 아홉 마을 촌장은 시냇물에서 계욕을 하고 있었다. 문득 하늘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구지봉에 가서 신령한 임금을 맞이하라는 음성을 들었다. 이들은 무리 二, 三백인을 거느리고 구지봉에 와서 각기 봉우리의 흙을 한줌씩 움켜들고 '거북아 거북아 머리 그 분을 나타내시오. 아니 나타내시면 구워서 먹으리이다' 노래를 부르며 춤추고 놀았다. 그러자 하늘에서 붉은 보로 싼 금빛 함이 내려왔는데, 그 안에는 알이 여섯 들어 있었다. 하루가 지나니 알들은 여섯 동자로 변하여 있었다. 동자들은 날로 크게 자라 다시 열 며칠 지나자 키는 아홉 자가 되었다. 먼저 나타난 이가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동자들은 각기 가야의 왕으로 추대되어 갔다." 노래와 설화를 설명한 비음기는 비의 제작과정 설명으로 이어진다.
 
"앞의 노래는 구지봉에서 무리들이 신령한 임금을 맞으려 부른 축도가로 우리 가요사상 전하는 가장 오랜 집단요로써 고대 제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가요형식을 갖추고 있다. 신군이 탄강한 이곳에 그를 맞으며 부른 백성들의 노래를 새겨 영원히 기념한다. 글은 문학박사 황패강이 짓고 전면 글씨는 문학박사 김동욱 후면은 김해문화원장 류필현이 썼다. 一九八六년 十二월 二十八일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와 김해문화원이 공동으로 세우고 문학박사 강용권, 이동영이 주관하였으며 김해시와 가락중앙·김해종친회가 협찬하였다."
 
비의 하단에는 비석을 세우는 데 힘과 마음을 보탠 이들의 이름이 새겨졌다. 부산대, 동아대, 동의대를 비롯해 전국 여러 대학의 국문학과 교수들과 김해의 관련단체와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현대문학평론가 장양수(전 동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씨는 "당시 동아대학교 강용권 교수(작고)의 주도로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가 비를 건립했다. 고전문학 전공 학자들은 물론 현대문학 연구자들도 마음을 보탰다. 1985년 울산 개운포에 '처용가비'를 처음으로 세웠고, 두 번째로 김해에 '구지가비'를 세운 것으로 기억한다. 구지가는 4구절만 전해지고 있어 정확히 무슨 노래인지 알고자 하는 연구가 계속 되고 있는 중요한 노래이다"며 당시의 상황을 전해준다.
 
수로왕만큼이나 김해 사람들에게 익숙한 구지봉 입구에 서 있는 '영대왕가비'는 시민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극단 번작이' 조증윤 대표는 "구지가의 '구워서 먹으리라'는 구절에서, 문화를 잘 구워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겠다는 의미로 극단 이름을 '번작이'라고 했다. 구지가는 우리민족 최초의 연희적인 요소가 있는 노래이다. 그렇게 보면 김해가 한반도 연극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번작이'를 설명한다.
 
▲ 1986년 당시 제막식 장면(가운데·김해문화원 제공)에는 '영대왕가비'의 뒷면이 보인다.
1986년 당시 막 김해문화원에서 일을 시작한 허모영 현 사무국장은 오래된 앨범에서 비 제막식 사진을 찾아내 보여준다. 허모영 씨는 "우리 문학사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노래를 새긴 비인데, 김해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구지봉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구지가를 잘 알 수 있도록 한글로 풀어쓴 안내문도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구지터널에서 구지봉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구지봉에 대한 안내문이 있을 뿐, 구지가를 설명하는 안내문이 없어 아쉬운 마음이 든다. 비를 둘러본 뒤 구지봉 정상에 올라섰다. 수로왕릉으로 자리를 옮긴 '천강육란석조상'이 있던 구지봉 정상부는 거북 머리 모양의 조형물이 서 있다. 소나무가 그 주위를 호위하듯 둘러서 있다.
 
아득한 옛날, 아직 왕이 없었던 가야의 백성들이 여기에서 노래를 불렀다.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노래, 죽음을 극복한 삶의 노래,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노래, 하늘에서 내려온 왕을 맞는 노래가 여기에서 불려졌다. 옛 가야의 백성들은 구지봉에서 한 마음으로 구지가를 불렀다. 한 세상을 여는 노래였다.

▲ 비석이 있는 길 건너 옛 허황후릉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구지봉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서면 잘 단장된 허황후릉이 보인다.

사적 429호 구지봉

김해 구지봉(龜旨峯)은 사적 429호이다.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에 위치하고 있다. 구지봉은 서기 42년 수로왕이 탄강한 성스러운 장소이다. 구릉의 모양이 거북을 닮았다고 하여 구수봉(龜首峯) 구봉(龜峯) 등으로도 불린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실린 수로왕 탄강설화는 구지봉이 가야 500년 역사의 출발지인 동시에 고대 국문학 상 중요 서사시인 '구지가'가 탄생한 곳임을 알려준다. 본래 허왕후릉의 산록 끝이 구지봉의 정상부이다. 전체 모습이 거북이 모양인데, 우리민족의 정기를 말살시키려는 일제는 거북의 목 부분을 잘라 도로를 냈다.
 
현재는 구지터널로 허왕후릉과 구지봉이 연결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해반천으로 물을 먹으러 내려오는 거북모양이 복원된 것이다. 구지봉 전망대에서 보면 해반천과 대성동고분군 등 옛 가야의 중심지가 내려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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