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선임기자

두 개의 사건이 있다. 두 사건은 별개로 진행 중이다. 하지만 어느 한 부분에서 마주친다. 한 사건은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일가의 갑질과 탈법 의혹이고 다른 하나는 드루킹 댓글 사건이다. 두 사건이 마주치는 부분은 바로 여론 형성 과정이다. 디지털미디어 환경에서 조성되는 공론장의 한 단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에서는 건강하고 믿음직한데 다른 한편에서는 불안하고 신뢰할 수 없는 모습이다. 

대한항공 사원들의 카카오톡 채팅방은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사건을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닌, 재벌 문제로 확장시키고 있다. 3개나 되는 노조를 통하지 않고도 사원들이 경영진들에 대해 갖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익명의 채팅방 덕분이다. 그런 측면에서 대한항공 사원들이 촛불집회에서 쓰고 나오는 벤데타 가면은 이 상황에서 잘 어울린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주인공 브이는 생체실험의 희생자로서 부당한 권력을 심판한다. 벤데타(vendetta)의 원래 뜻은 '복수'지만 영화는 개인적인 앙갚음에서 나아가 부당한 권력과 그 시스템에 대한 항거를 보여주고 있다.

대한항공 사원들의 항거가 바깥 사회의 공감을 얻는 것은 기형적인 재벌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이제 사회가 기회 평등과 공평을 요구하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재벌개혁에 대해서는 누구나가 거론했지만 지금까지 어떤 정부도, 어느 정치권도 실현시키지 못했다. 당장 국회에 계류 중인 상법 개정안이 30여 개나 되는데, 각 정당과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현실화는 요원하다. 공정거래법도 이번 정부 들어 겨우 개정 논의가 구체화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재벌개혁의 당위성을 알리면서 이를 추동하는 큰 힘이 되는 것이 대한항공 사원들이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익명 채팅방에 만들어진 공론장이다. 디지털미디어가 개인의 의견을 어떻게 수렴하고, 또 이것이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드루킹 사건은 반면 디지털미디어에서 형성된 공론장이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가를 시사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댓글은 개개인의 의사표시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뿌리와도 같다. 불특정 다수가 소통하는 공간에서 특정 의견을 다수 의견으로 조작하는 것은 민주성과 공공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드루킹 사건 이전에 전 정권에서는 아예 국정원과 보안사 등 국가기관을 이용해 조직적인 댓글 조작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권력을 잡기 위해 민주주의의 기초마저 무너뜨린 당사자들은 이제와서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

디지털 공론장은 미래 시민 사회의 대안이라 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와 익명성이 보장되면서 오프라인에서의 의사표시에 제약을 받는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를 뚜렷하게 낼 수 있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타자에 대한 상호이해를 토대로 하여, 합리적 이성에 의해 진행되는 의사소통의 네트워크"라고 규정했다. 디지털미디어를 이용하는 누구나에게 일관되게 '합리적 이성'을 요구하는 것은 다소 비현실적일 수 있다. 그렇다고 댓글란을 없앤다든지 하는 극단적인 조치는 오히려 공론장을 억제할 뿐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참여와 정치 경제적 이해에 결부되지 않는 합리적 토론은 포기되어서는 안된다.

대한항공 카톡방에서 보여주는 디지털 공론장의 긍정적 모습과 연이은 댓글 조작 사건에서 드러나는 부정적 모습을 우리는 동시에 목격하고 있다. 문제는 이 긍정과 부정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이 또한 네티즌들의 역량이 모아져야 할 부분이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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