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전파 과정의 역사 통해 
인류 역사의 사회적 맥락 짚어 
유럽 공통어 프랑스어 밀어낸 영어
동아시아 지배한 중국의 한자 등



'외국어는 어디에서 어디로, 누구에게 어떻게 전해졌는가?' 외국어 전파 과정의 역사를 통해 인류 역사의 시대적·사회적 맥락을 짚어낸 세계문화사, <외국어 전파담>이 출간됐다.
 
미국인 언어학자인 저자가 시종일관 한글로 쓴 이 책은, 인류는 언제부터 왜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을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해 외국어 개념의 등장과 외국어 전파 과정을 둘러싼 패권의 강압적 전개와 불평등의 역사를 세밀하게 읽어낸다.
 
외국어라는 개념은 근대 국가의 형성 이후 등장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국가는 세계 질서의 기본 단위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어라는 단어 자체도 있을 리 없었다. 근대 이후 세계 질서의 기본 단위로 국가 개념이 만들어지면서 국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국어가 지정되고 강제된다. 국가 간 교류와 인적 이동이 잦아지면서 한 나라의 국어가 다른 나라에 외국어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외국어 전파의 통로를 따라가다 보면, 세계 역사의 흐름과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언어는 국경 밖으로 퍼져 나가면서 철저히 힘의 논리에 좌우됐다. 힘 있는 국가의 언어는 힘없는 국가에 전파되었는데, 이른바 제국주의 국가들의 언어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이 과정에서 군대의 존재는 빠질 수 없었고 그 안에서 새로운 외국어 학습법이 탄생하기도 했다.
 
외국어의 대명사로 영어가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대영제국의 거침없는 활보에서 비롯됐다. 그 이전 유럽의 공통어인 프랑스어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최근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영어의 전 세계적인 패권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맹주 중국인 한자와 한문이 동아시아 주변국들을 지배했다. 제국주의 후발 주자 일본은 점령하는 곳마다 그 나라의 말을 억압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다. 

고대문명 발상지에서 탄생한 문자는 해당 문화권은 물론 인접 지역에까지 패권을 형성했다. 문자를 아는 계층이 문자를 모르는 계층을 지배했다. 다른 문화권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지배계층에 국한됐고, 문자의 습득 여부는 곧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구분하는 장치로 작용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언어는 지배층의 울타리를 넘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글이 아닌 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권력은 분산됐고, 나라마다 표준 국어를 둘러싼 힘의 논리가 작동했다. 그것은 곧 종교의 확산, 상업 활동의 활성화, 근대국가의 등장과 패권 경쟁, 자본주의의 출현과 팽창, 제국주의 침략과 전쟁의 역사로 연결된다.
 
이처럼 불평등하고 강압적인 방식으로 전개된 패권화된 강대국의 언어 정책에 맞서 자국의 언어를 지키기 위한 국가들의 민족주의적인 노력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언어의 전파 과정을 통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이 어떻게 만나고 충돌하며 침략과 지배, 저항의 역사를 써왔는가에 저자는 주목한다. 책에는 한국 중국 일본은 물론 인도 베트남 몽골 이슬람왕조 아프리카 아메리카 선주민 등 다양한 문화권의 언어를 둘러싼 여러 풍경이 포괄적으로 담겨 있다.
 
외국어 전파 과정을 통해 역사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저자의 관점과 방식은 사회·역사적인 관점에서 서양 예술사를 서술한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주제를 요약하면 시대의 예술은 위대한 개인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인데, 하우저의의 관점과 방식을 빌려 외국어의 전파 과정과 그 사회적 의미를 살펴보고 싶었다"고 저자는 털어놓는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상업주의와 무역의 발전에 따라 외국어라는 개념이 어떻게 등장했는가에서부터 17~18세기 근대국가의 형성과 식민주의, 19세기 산업혁명과 제국주의를 거쳐 20세기 전쟁의 시대와 그 이후 전 세계적인 글로벌화와 인공지능을 장착한 통번역장치의 등장 등 최신 디지털 혁명까지 포괄하며 외국어 전파 과정의 역사와 그 변화를 살핀다.
 
언어 전파의 역사는 곧 인류 문명의 역사이며, 앞으로의 언어 전파 과정을 살핀다는 것은 21세기 문명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인류사를 항해하는 '언어 오디세이'호(號)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부산일보 /백태현 선임기자 hy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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