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반천을 따라 쾌적하고 예쁘게 자리한 '가야의 거리'. '춤추는 시계탑'에선 황세장군과 여의낭자가 옛 가야의 시간과 현재를 이어주는 듯 하다.

춤추는 시계탑·시민의 종·뿔잔 분수
8년여 공들인 '한국의 아름다운 길' 가로수와 가로등·쉽터
그 어느 곳도 옛 가야의 자양분이 숨쉬고 내일의 역사가 될 오늘이 펄떡인다.


국립김해박물관에서 '가야의 거리'로 나선다. 박물관에서 봉황대까지 해반천을 따라 난 2.1㎞의 쾌적하고 예쁘장한 길이다. 김해시가 1996년 12월부터 2005년 7월까지 3단계에 걸쳐 8년 반 동안이나 만들어 온 길로, 2007년에는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들었다.

봉황대유적(3단계)~대성동고분군(2단계)~구지봉(1단계) 등을 연결하는 길이라 '가야유적연결로'라고도 했고, 박물관 북쪽 끝 연지교에서 '춤추는 시계탑'이 있는 경원교까지의 1단계 완성 후에는 한동안 '문화의 거리'란 이름으로 불렸었다. 오늘 우리가 걸어가는 '가야의 거리'는 경원교까지만으로, 조성사업의 첫 단계였던 이 구간 완공 후에 김해시는 필자에게 '문화의 거리'를 소개하는 서사시풍의 글을 부탁한 적이 있다. 가야사를 전공하는 김해시민이란 죄(?)로 엉겁결에 수락한 것이었으나, 워낙 없는 글재주 탓에 지금은 끊은 담배 몇 갑만 피워댔던 기억이 있다. 연지교 바로 앞의 안내판에 몇 년 간인가는 잘 붙어있더니

▲ 가야의 거리 안내판
'가야의 거리'가 완공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글값 한 푼 받지 않고 손을 물어뜯으며 썼던 것이 아깝기도 하고, 지금 걷는데도 이렇게 쓸 것 같아 따로 여기에 옮기면 어떨까 생각했다. 웃는 얼굴 문양의 청동말방울 모양으로 장식된 '가야의 거리' 안내판에는 원래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문화의 거리에 서서 / 문화의 거리에 서서 낙동강 아랫길 쇠(金)바다(海)에 펼쳐진 가야의 영화를 되뇌어 본다. 이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구지봉의 고인돌은 새나라 열던 수로왕을 지켜보았고 허왕후릉의 파사석탑은 수줍던 공주의 혼례길을 따라 왔다. 수로왕을 맞이하던 가락의 아홉 촌장은 구지가로 노래되었고 불꽃으로 가야토기를 매만지며 쇠부리질과 담금질하던 가야사람들의 망치소리는 해양왕국의 꿈으로 남았다. / 우리는 이 땅에 속삭여지던 가야의 이야기를 '문화의 거리'로 만들어 간다. 구지봉 끝자락의 해반천과 맑은 송림에다 물소리와 나부끼는 바람으로 가야 사람들과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아보자. / '신화의 벽'과 '아홉 촌장바위'로 단장한 '문화광장'은 가야의 품안에서 우리가 벌일 잔치의 무대이다. 가락구촌의 할아버지들은 묵직한 아홉의 돌들로 눌러 앉았고, 수로왕의 나라세우기와 허왕후의 혼례는 돌 그림으로 새겨졌다. 가로수의 그늘이 떼지어 장난질하는 '역사의 벽'에는 가야인의 멋과 재주를 아로새겨 담았다. / '역사의 벽'을 지나 상설전시장에서는 가야의 손길을 만져보고 가야의 숨결에 취해 보자. 삶의 때로 반질거리던 가야인의 현세와 하늘에 고개 숙이던 가야인의 내세를 토기와 무덤의 유물로 되살렸다. /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 가득한 시민의 숲으로 가자. 가족소풍도 좋고 한여름의 더위를 피하는 그늘과 바람도 좋다. 우리 할머니 손 때 묻은 돌절구도 있고 맷돌도 있다. 할아버지 품같은 소나무 숲에서 쉬며 뛰노는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이며 희망이다.
 
▲ 뿔잔 분수
가야의 추억을 감춰두고 나오는 오솔길 끝에 만남의 광장이 있다. 뿔잔의 가야토기로 모양낸 조형분수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즐겼던 가야 사람의 멋을 시원스런 물줄기로 뿜어내고 있다. 광장의 복판에서는 지난날과 오늘 그리고 내일이 '춤추는 가야금의 시계탑'으로 만난다. 황세장군과 여의낭자는 황금알을 깨고 나와 춤추며 우리의 지금을 알리고 있다. 가야금 열두 곡의 선율은 가야의 옛 서울 김해를 밝은 미래로 안내해 줄 것이다. / 문화의 거리에 서서 가야의 영광과 김해의 희망을 노래하자. 문화의 거리에 서서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하자. 문화의 거리에 서서 우리가 해야 할 일과 우리가 전해줄 미래를 바라보자."

▲ 춤추는 시계탑
'춤추는 시계탑'이란 이름처럼 원래는 시간마다 황금 알이 열리고 황세장군과 여의낭자가 춤추며 가야와 김해의 시간을 이어주기로 설계되었지만, 요즈음 알은 열려진 채이고 장군과 낭자는 그냥 서있기만 하는 것 같다. 이름을 바꾸든지, 춤을 추게 하든지, 어느 쪽이든 해야 할 것 같다.

시계탑 길 건너에는 '시민의 종'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제야의 종 타종식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해 11월 25일 첫 타종식을 가졌던 '시민의 종'은 말 그대로 시민의 성금(3만5천292명·2억4천457만2천500원)으로 만들어진 김해시민의 종이다.

종탑 아래 방에는 사면에 동네 별로 모아 적은 기부자 명단이 빼곡하다. 이분들 덕택에 매년 김해에 앉아 서울시장이 치는 보신각 타종식을 보며 새해를 맞이하던 우스꽝스러움을 이제는 접을 수 있게 됐다. 올해도 '희망 김해 2011' 제야의 종 타종식과 음악회 등이 예정되어 있다는데, 무게 21t, 높이 3.78m, 직경 2.27m의 거대한 종에는 구름 탄 가야 기마전사상의 부조가 비천상을 대신하고, 그 아래 단에는 수로왕 탄강과 허왕후 시집오는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보통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신라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를 재현했다는데, 넓게 퍼져가는 은은한 울림이 그럴싸하지만, 가야의 뜰에 정복국(?) 신라의 소리가 퍼져가는 것 같아 다른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종탑은 언뜻 보기에도 가야토기의 굽다리접시를 모델로 한 것 같다. 파란 겨울하늘을 배경으로 보는 대낮의 모습도 시원하지만, 여름밤에 조명과 함께 보는 그림도 환상적이다.

▲ 시민의 종
'시민의 종'을 돌다 보니 바로 옆에 부직포로 가려진 공사장 펜스 같은 게 눈에 거슬린다. 고개를 빼들어 들여다 보는데, 시커먼 얼굴 하나가 소리지르며 튀어나온다. 뭐 잘못했나 싶어 놀란 가슴을 다스리는데, 갑자기 나타난 선생을 반가워하는 졸업생의 인사였다. 옛 실로암유치원을 관광안내소로 리모델링하고 '시민의 종' 사이를 주차장으로 만들기 위해 시작한 발굴조사란다. 제자의 안내로 현장에 발걸음을 옮겨보니, 마침 김해 역사의 주요 장면을 연출했던 유적 하나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고읍성(古邑城)'이라 불리는 유적이다. 1820년의 김해를 그렸던 지도에 조선시대의 김해읍성 바깥쪽을 더 넓게 두르고 있었던 토성(土城)이 이제 막 출토되는 참이었다.

내외 양쪽 하단에 세 단의 석축을 들어 올려 쌓고, 그 사이를 흙으로 다져 올린 토성인데, 내측 석축기단 안쪽으로 판축토성의 일부가 노출되고 있다. 고려기와가 포함된 판축토성 밑에서는 가야 초기의 목관묘(木棺墓)도 확인되고 있다. 1993년 바로 앞을 지나는 구지로 조성공사 때 발굴조사에서 이마에 철제 관(冠)을 쓰고 나타난 가락국 초기, 그러니까 수로왕 시대의 인골이 발견된 곳에서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발밑에는 가야~신라~고려~조선의 모든 시대에 걸친 김해인의 흔적들이 수없이 잠들어 있다. 사는 데 약간의 불편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 조상들이 전해주는 생생한 역사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언제나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많은 주장들이 충돌하기도 하지만, 역사고고학자들도 모두를 다 남기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지역과의 차별성을 강조할 수 있는 우리만의 명함으로 발전시킬 자산이 될 수도 있는 만큼, 참고 지켜보며 김해 역사의 발굴을 위해 고생하는 대원들도 격려해 주시기를 부탁하고 싶다.

옆에 있는 김해서중의 정문을 차로 들어서면 재미있는 놀이(?) 하나를 즐길 수 있다. 안쪽으로 향하면서 자동차의 왼쪽 창문을 열면 구봉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뛰노는 하이톤(높은 음색)의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다가, 왼쪽을 닫고 오른쪽 창문을 열면 어느새 굵직하게 총각 다 된 걸쭉한 남중학생들의 목소리가 제법 무게 있게 들려온다. 양쪽 창문을 번갈아가며 열고 닫는 한가한 놀이에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건 이들이 김해의 희망이기 때문일 것이다.

김해서중에서 동쪽으로 구지로를 따라 김해교육청, 김해여중, 김해건설공고의 교육시설이 줄지어 있다. 1955년 설립의 김해여중이 1974년 제일 먼저 여기에 자리 잡았고, 1978년에 김해건설공고, 1980년에 구봉초등학교, 1981년에 김해서중이 연달아 교육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러나 대개 30여 년 동안 각 급의 많은 학생들을 키워냈건만, 이제 모든 학교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 '가야의 땅' 이라 이름 붙여진 가야사 복원 2단계 사업이 이곳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시민의 종'을 정면으로, 수로왕의 탄강을 상징하는 '빅 에그'라든지, 해상왕국 가야를 상징하기 위해 기존의 건축물들을 배 모양으로 리모델링하겠다든지, 가야의 철을 주제로 하는 테마파크가 계획되기도 하였으나, 시장도 바뀌었고 어떤 계획이 추진될 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 학교들에서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는 구지로의 활력이었는데, 과연 어떤 테마파크가 이들을 대신할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한다.


건설공고의 매화
현대 수묵화의 거장도 반한 '와룡매'

건설공고의 '와룡매'(사진)를 아시나요? 사진작가들에게는 전국적으로 유명하고, 매화축제도 매년 개최되지만, 잘 모르거나 한참 설명 끝에 "아, 학교 안에 있는 그거? 그기 그리 대단한 기가?" 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 1927년 개교한 김해농고의 일본인 교사가 심었던 것을 농고의 외동 이전 후에도, 1978년 3월 개교한 건설공고가 관리해 오고 있는 고목의 매화이다. 굵고 오래된 줄기가 이리저리 뒤틀려가며 땅위를 기는 모습이 엎드린 용 같다 해서 '와룡매(臥龍梅)'라 부르는 모양이다. 나이 들어 힘이 드는지 남들보다는 조금 늦게 3월 초부터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20여 그루의 와룡매가 70여 그루의 홍매 청매와 섞여 있다. 현대 수묵화의 선두 홍대 문봉선 교수가 감탄을 거듭하며 쪼그려 앉아 붓을 내달리던 모습도 있었고, 올해처럼 폭설 속에서 고개 내민 설중매로 만날 때도 있다. 몇 해 전에는 이 매화를 키우던 일본인 교사가 90대 노인의 몸을 이끌고 찾아와 회상과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도 있다. 어떤 테마파크로 변하더라도 이 매화는 절대 남아야 하고, 오히려 중요 소재로 적극 활용될 필요가 있다.

 





이영식_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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