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 인문계 졸업생들의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문과 비하의 자조적 말이 생겨났다. 미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실패의 사회학' 저자 메건 맥아들은 "영문학을 전공하고 싶다면 우선 스타벅스 매장에 취업할 빈자리가 있는지부터 알아보라"고 했다.

오래 전 TV특강에서 본 세계 복싱 사상 8대 기구 통합 챔피언 여성복서 김주희 선수가 생각난다. 가출 어머니에 아버지는 병석에 누웠고 언니가 주유소 알바를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언니마저 도망 갈까봐 일하는 언니 망보기 좋은 주유소 맞은편 2층 건물을 찾은 곳이 바로 체육관이었다.

관장의 권유로 복싱을 시작했고 처음 한동안 권투 기술은 전혀 배우지 못했다. 삼국지 등 책만 읽게 하고 독후감을 써 오라는 것이 전부여서 체육관을 그만 둘까도 싶었다. 훗날 그녀가 이토록 화려한 경력을 갖게 된 가장 큰 밑거름은 독서였다고 털어 놨다. 책 속에는 이기는 방법이 있고 왜 이겨야 하는지도 책 속에서 배웠다는 뜻이다.

또 다른 사례는 조선시대 전남 장성의 외눈박이 신동 노사 기정진의 얘기다.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와 조선에 큰 인물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천자의 명(命)이라며 괴상한 문제를 냈다. '동해에 고기(魚)가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척추 뼈도 없다.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 그림으로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면 모가 난다. 이것은 무엇이냐.'

조선 팔도 내로라하는 학자들도 답을 내놓지 못하자 조정은 전전긍긍했고 급기야 어린 기정진을 불러 올렸다. 문제를 읽고 난 기정진은 어렵지 않게 정답을 내놨다. 고기 어(魚)자에 머리와 꼬리 부문을 제거하면 밭전(田)이 되고 다시 척추에 해당하는 획(l)을 없애면 일(日)자만 남는다. 겨울철(용 辰)에는 해가 짧고 여름철(호랑이 寅)에는 해가 길다.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면 모가(日) 나는 것은 바로 '해(日)'이다.

기정진의 문제풀이에 임금과 조정대신들은 크게 감탄했고 '장안(서울)의 수많은 눈들이 장성의 한 눈만 못하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이렇듯 조선의 체면과 국격을 세운 것은 역시 인문학이었다.

최근 '조지 앤더슨'기자의 저서 '왜 인문학적 감각인가'에서는 '인문학은 통념과 달리 돈이 되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기술발전과 혁신의 중심이 된다' 고 한다. 미국 내 평생소득 자료에서 최상위 10% 고소득층은 정치학, 역사학, 철학 전공자들이었다.

최초 디지털 카메라 원천기술을 갖고도 미래 흐름을 읽지 못해 아날로그 필름시장의 종말을 목도한 코닥, 글로벌 게임시장에서 애플의 스마트 폰이 자신의 경쟁상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해 추락한 닌텐도 등은 미래를 보는 눈이 없었다. 반면 디지털게임에 밀려 고전하던 레고는 '완구'라는 명사적 사고를 버리고 '놀이'라는 동사적 사고로 전환하면서 부활했다. 나이키는 모바일 앱과 착용할 수 있는 웨어러블 기기 보급으로 청소년들을 다시 운동장으로 불러내는데 성공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소비자의 욕구를 일깨우기 위해 생전에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을 그토록 강조했다. 현재의 기술수준 못지않게 미래의 사회·문화 환경을 분석 예측하고 명확한 발전 방향을 설정하는데 슬기로운 혜안이 더 없이 요구된다.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해주는 것이 인문학이다. 이제 4차 산업혁명의 첨단기술 시대 '문덕분입니다(인문학 덕분입니다)' 라고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김해뉴스 /강한균 인제대학교 명예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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