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저고리시스터부터
K팝 전성기 이전 1999년까지 
시대별 '전설의 걸그룹' 보고서



명실상부 한류와 한국 대중음악을 이끌어가는 걸그룹. 한데 이들 걸그룹의 원조가 궁금해진다. 어쩌면 요즘 젊은 세대들은 1997년 등장한 'SES'나 1998년 데뷔한 '핑클'을 걸그룹의 원조 혹은 조상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니다. SES와 핑클이 한국 걸그룹의 원조라면,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대중에게 춤과 노래로 즐거움을 선사했던 그 많은 걸그룹들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까?
 
<걸그룹의 조상들>은 1935년부터 1999년까지, 현재의 K팝 전성기 이전의 걸그룹의 조상들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문화유산에 경중은 없다. 하지만, 이 책에 모여진 자료들은 유독 소중하다. 가수를 '딴따라'라고 경시했던 풍토에서 음반마저 버려졌으니 포스터나 책자 등의 운명은 어떠했을까. 음악 평론가인 저자는 그런 세월의 시선을 견디며 먼 거리나 금액을 마다치 않고 수고를 들여 자료를 모았다. 이미 명멸했던 과거의 걸그룹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나라에 있는 걸그룹을 하나하나 추적해나간다. 책에는 한국 최초의 걸그룹인 1935년 '저고리시스터'를 시작으로 1940년대 암흑기의 걸그룹부터 1990년대 신세대 문화의 등장과 함께 탄생한 요정 걸그룹까지 시대별 특징이 잘 정리돼 있다. 2000년대 걸그룹은 끝부분에 짧게 언급했다.
 
책은 시대순으로 되어 있다. 먼저 1935년 이미 활동했던 저고리시스터를 불러온다. 여기서 '시스터'는 걸그룹이라 의심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 저고리 시스터즈.

 
저자는 "한국 걸그룹 역사의 원년은 저고리시스터가 소속된 조선악극단이 등장한 1935년으로 봐야 한다. 이들은 한국 걸그룹의 역사에서 최초로 공식 이름을 지닌 팀이다"라고 주장한다. 저고리시스터의 멤버로는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을 비롯해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오빠는 풍각쟁이'의 박향림, 그리고 이화자, 유정희, 홍청자, 임순이, 김능자 등이 참여했다. 하지만 저자는 이들에게 공식적으로 '최초 걸그룹'이라는 명칭을 주기엔 무리가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공식 음반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앨범을 내고 공식적으로 활동한 걸그룹이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를 1950년대로 꼽는다.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이 1953년 딸과 조카로 구성한 걸그룹 '김시스터즈'(숙자, 애자, 민자)로, 동서양 악기를 만능으로 다룬 이들은 미국에 진출해 큰 인기를 끈 '원조 한류 스타'였다. 저자는 "김시스터즈는 한국 음악 사상 가장 화려하고 음악적으로도 뛰어났던 최초의 공식 걸그룹"이라 말한다. 1959년 국내를 넘어 아시아 걸그룹 최초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해 국제적 스타로 성장한다. 이는 2009년 미국에 진출한 '원더걸스'보다 무려 50년 앞선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가수 이난영이 단순히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왕년의 인기가수가 아니라 한국 걸그룹의 개척자이자 대모였음을 알 수 있다.

▲ 아리랑잡지 1961년 2월호에 실린 이난영과 김씨스터즈.

김시스터즈 이후 활동했던 이시스터즈, 펄시스터즈, 은방울시스터즈 등도 모두 '시스터'라는 이름을 내세운 걸그룹이었다. 이 중에는 친자매로 구성한 팀도 있었지만, 생면부지의 남이 모여 시스터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경우도 있다.

책에선 김시스터즈, 이시스터즈, 펄시스터즈 등 전설의 걸그룹 외에도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블루리본의 명정강, 걸그룹들의 의상을 책임졌던 노라노, 김시스터즈의 뒤를 이어 미국에 진출했던 김치캣, 서구적 미모의 마운틴시스터즈에 이르기까지 이름만 들었던, 혹은 이름조차 듣지 못했던 수많은 걸그룹의 화려한 면면을 모두 만날 수 있다. 
 
걸그룹의 역사는 이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 편견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수많은 걸그룹은 성(性)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비판도 있었다. 동양의 여성이라는 신비감 때문에 해외에선 큰 환영을 받았지만, 정작 우리 사회에서는 이를 애써 외면하고, 은밀하게 애정을 쏟는 주간지의 주제어 정도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 책은 지난 시대 걸그룹의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즐거움과 수많은 모순과 편견의 시대에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겪어야 했던 삶의 부침 등도 가감 없이 담겨있다. 걸그룹의 기원을 쫓는 흥미로우면서도 의미 있는 보고서이다.

부산일보 /정달식 기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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