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일본의 성개념 '대중화'
성전환 수술·남장행색 '신여성' 등
당대의 사회 문화상 생생히 소개



'퀴어(Queer)'는 본래 '이상한' '색다른' 등을 뜻하는 단어였다. 현재는 레즈비언(Lesbian)과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와 성전환자(Transgender)의 머리글자를 딴 LGBT처럼 '성(性) 소수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쓰인다. 오랜 기간 이들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조차 '불편'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인권의식의 증진과 함께 다른 '성적 취향'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조선의 퀴어>는 엄혹한 식민 통치와 파격적인 문화 변동이 공존하던 1920~30년대 조선의 '변태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근대의 틈새에 숨은 변태들의 초상'이란 부제가 붙은 책은 동성애와 인터섹스(Intersex, 남녀한몸), 크로스드레싱(Crossdressing, 남장 또는 여장)과 트렌스젠더 등 오늘날 '서구적인' 개념이라고만 인식됐던 것들이 이 시기 조선의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1930년대 조선을 배경으로 여성 동성애를 적나라하게 담아 화제가 됐던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2016년 작)가 실제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는 얘기다. 히데코 역의 김민희와 숙희 역을 맡은 김태리의 리얼한 동성애 연기 덕에 '아가씨'는 '19금(禁) 영화' 역대 최고 흥행작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20~30년대는 조선에서 서구의 성 과학 지식이 대중화되는 시기였다. '변태 붐(Hentai Boom)'이라고 불릴 만큼 성 과학 지식이 만연했던 일본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다. 여성학자인 저자는 이 시기를 "'변태성욕' '반음양(半陰陽)' '여장남자' '동성연애' 같은 새로운 분류와 이것을 뒷받침하는 앎의 체계들이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라고 설명한다. 서구의 성과학 지식이 수입되고 번역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젠더(Gender) 비순응자들의 다양한 사례들이 신문과 잡지를 통해 다뤄지게 된다.
 
이 시기 유행했던 단어 중 하나가 '에로 그로 난센스'. 관능적(Erotic)이고 기괴한(Grotesque), 비상식(Nonsense)의 영어 단어를 합친 '에로 그로 난센스'는 자극적인 보도를 통해 매출을 올리려는 신문사들의 열망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원하는 대중의 욕구가 맞물리며 식민지 조선에서 크게 유행했다. 1929년 9월 29일 자 <조선일보>에는 '그로 범죄'가 소개된다. "여자의 묘를 파고 수의를 훔친 변태성욕자"라는 제목의 기사는 경북 봉화에 사는 지남성이라는 남성이 5년 전부터 공동묘지를 돌아다니며 20여 개 여자 무덤을 파헤쳐 시체의 수의를 벗겨 집에 보관하고 시신을 훼손시킨 내용을 상세하게 담고 있다. 기사의 선정성은 이에 그치지 않고 지남성을 '극단의 변태성욕환자'로 명명한 후 '상당한 재산가'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남색(男色)으로 불리는 남성 간 동성애는 '수동무'로 표현됐다. 성인 남성과 상대방인 미동(美童)은 서로 다른 의무를 졌다. 어른은 단오와 추석, 설날 등 명절에 미동에게 옷을 한 벌씩 지어주는 등 경제적 후원을 해야 했고 미동은 순종하며 성관계에서 수동적 역할을 요구받아야 했다. 수동무 관계를 맺은 소년들이 주변인으로부터 '작은 마누라'로 불리고 상대의 부인에게선 '동서'로 불렸다는 증언이 눈길을 끈다. 당시의 '변태성욕' 기사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남색과 범죄를 연결짓는 상상력이었다. 1931년 <동아일보> 등 도하 신문에는 '근대미문의 살인마'가 탄생했다는 소식이 실렸다. 이관규라는 35세 남성이 여러 소년을 강간한 후 살해했다는 내용을 전하며 그의 성품을 소상하게 서술하고 있다.
 
여성 사이의 친밀감은 'S관계'로 불렸다. '소녀'를 뜻하는 영어 Sister 또는 일본어 '쇼죠(しょうじょ)' 때로는 섹스(Sex)의 앞글자를 딴 것으로 이해됐다. 'S관계'는 "여학생 시대로 돌아가 동성연애를 하고 싶다"는 고백이나 크리스마스 시즌에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메시지가 새겨진 염동반지를 주고받는 관행으로 이어지며 당대 여성 동성애가 여학교 중심으로 일반화했음을 보여준다. 여성 동성애는 김용주 등 남성 지식인들의 비판처럼 '바람직한 여성상에서 이탈한 히스테리적인 여성'으로 규정됐지만, 한정되지 않은 여성 주체의 등장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다.
 
책은 또 키스(Kiss)와 관련한 다양한 범죄와 풍속을 비롯해 24살까지 '계집 노릇'을 해오다 진정한 성별이 남성에 가까운 ‘반음양’이란 진단을 받고 성전환 수술로 남자가 된 일본인의 이야기, 남장 행색으로 공고한 성별 특권의 경계를 넘으려던 '신여성’ 등 당대의 사회문화상을 생생하게 소개한다. <조선의 퀴어>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위에 선 다양한 성적 실천이 '변태성욕’이란 말로 뭉뚱그려졌던 근대 조선의 시·공간을 '섹슈얼리티(Sexuality)의 역사’라는 관점으로 분석한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 그리고 '퀴어 이론’이라는 베틀 위에 100년 전 신문·잡지에 나오는 생생한 문헌 자료들을 실타래 삼아 우리의 '근대’에 대한 한층 풍부하고 입체적인 이해를 직조해 낸다. 저자는 "이 책이 소개할 퀴어한 존재들, 기이함과 낯섦을 통해 발견되는 과거가 현재의 규범들 역시 낯설게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한다. 
 
부산일보 /박진홍 선임기자 jhp@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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