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무도회 등 화려한 축제 성행
25명 인문학자 '도시' 키워드
18세기 장소의 역사성 탐구



18세기는 현대적 도시의 성장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변화와 격변의 시기였다. 유럽에서는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프랑스에서는 계몽주의 사상이 배양한 프랑스대혁명(1789년)이 일어났다. 어디 그뿐인가. 신대륙 아메리카에서는 1776년 13개 주(州)를 중심으로 '이민자의 나라'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동아시아는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 속에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뤘다. 중국 대륙에서는 청나라가 강희제와 옹정제, 건륭제의 치세를 거치며 오늘날의 영토를 완성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조선은 조손(祖孫)지 간인 영조, 정조가 나란히 통치하며 '후기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이 시기 일본의 도쿄는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메트로폴리탄적 도시가 됐고, 서울 인구도 30만 명에 육박할 만큼 성장했다.
 
<18세기 도시>는 25명의 인문학자가 '도시'를 키워드로 18세기 장소의 역사성을 탐구하는 책이다. 국제18세기학회 산하 한국18세기학회 소속인 이들은 1700년대 세계 도시의 다양한 면모를 소개한다. 외형적 기본 설계에 해당하는 토목, 건축은 물론 조경 조각 회화 문학 등 문학 등 문화예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등을 포괄한다. 나아가 당대 지성의 만남과 교류, 도시의 유흥과 소수자의 삶까지 더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유사한 기획에서 지역적 범위를 주로 서유럽과 동북아시아에 한정하는 것과 달리 동유럽과 신대륙, 동남아시아까지 대상을 확대해 가능한 한 세계의 전체상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이 책이 갖는 미덕이다.
 
책의 첫 장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부르주아 문화가 시작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 연다. 18세기 유럽 경제를 이야기하려면 1630년대에 있었던 '튤립 광기(tulipomania)'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실물 없이 거래가 이뤄지는, 오늘날의 선물거래와 유사한 현상이 시작되면서 튤립의 구근(球根) 값이 4년 사이 20배가 넘게 폭등하는 일이 벌어졌다. 투기 광풍 속에 막차를 탄 가난한 사람들은 속절없이 몰락했고 이 도시의 빈부 격차는 급속도로 커졌다.
 
가난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폴리의 '라차로니(lazzaroni)'다. 라차로니는 "나폴리에서 가장 낮은 계층의 야만적인 민중 집단"을 가리키는 말. 한마디로 말하면 '거지'이다. 당시 인구 200여만 명의 나폴리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로 인구는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에 견줄 만했다. 계몽사상가 몽테스키외는 나폴리 인구 중 라차로니가 5만~6만 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나폴리에 들어선 여행자들은 이렇게 아름답고 비옥한 땅을 가진 도시에 그토록 많은 하층민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데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베네치아는 어떠했을까. 이 도시는 '그랜드 투어'로 불리는 견문 넓히기 여행의 주요 종착지였다. 하지만 매춘 도박 등 퇴폐 업종도 함께 번성했다. 베네치아 카르네발레 축제에서는 가면무도회가 성행했는데 여성들 사이에서 검은색 가면 모레타(Moretta)가 인기였다. 이 가면을 쓰면 말을 할 수 없었고 대화를 하려면 가면을 벗어야 했다.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만 가면을 벗는다. 여성에게 자유와 선택권을 부여한 가면이라 하겠다. 
 
같은 시기 조선의 도읍 한양(서울)의 풍경은 어땠을까. "'담배 사려' 외치는 소리 끊어졌다 이어지고/ 행랑에는 등불 밝혀 골목길이 환하다/ 한가로운 네댓 사람 팔짱 끼고 말하네/ 밤새 군칠이집에 술을 새로 담갔다더군." 조선 후기 문인 서명인이 1766년 종루(鐘樓) 거리를 지나가다 본 풍경을 소재로 지은 시다. 시에서 거론된 군칠이집은 개장국 요리로 명성이 자자한 술집. 술독 100여 개를 보유한 대형 주점으로 18세기 서울 술집의 '대명사'이다. 술꾼으로 흥청망청했던 서울의 단면이라 하겠다. 당시 한양에는 군칠이집 외에도 술과 음식 맛으로 경쟁하는 가게가 거리마다 포진했다. 1794년(정조 18년) 과거에 급제한 이면승은 저서 '금양의(禁釀議)'에서 "골목이고 거리고 술집 깃발이 서로 이어져 거의 집집마다 주모요 가가호호 술집"이라고 비판했다. 안대희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당시 한양에서는 '남촌은 술을 잘 빚고 북촌은 떡을 잘 만든다'는 뜻의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이 성행했다고 소개한다.
 
당시 한양에는 소설이 대유행했다. 규방의 처자와 궁중의 비빈(妃嬪)은 물론 임금까지 소설 읽기에 몰입했다. <승정원 일기>에 따르면 영조는 중국 소설 외에 <구운몽> 등 한국 소설을 본 것으로 나온다. 소설을 베껴 돈을 받고 빌려주는 '세책(貰冊)집'이 등장할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북쪽의 한양' 격인 평양은 '박물장수의 천국'이었다. 조선 팔도의 물건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평양감사향연도'에 나타난 평양의 화려함과 풍요, 대동강 뱃놀이 풍경 등이 책에서 흥미롭게 묘사된다.
 
저자들을 대표해 서문을 쓴 정병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동아시아는 경제성장을 이룬 18세기는 현대적 도시화가 시작된 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역사적 공간을 경험하면 일상 공간도 다르게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이 책이 "수천 년 역사의 옛 도시 구도심을 걸어 다니다가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 마시는 자세로" 천천히 읽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부산일보 /박진홍 선임기자 jhp@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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