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접하는 디자인 연대기
사물·정보·환경 세 가지로 나눠
“시대 욕망 형상화·인문의 무늬”



"디자인이란 단순히 그것이 어떻게 보이고, 느껴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기능하느냐이다."
 
2007년 아이폰(iPhone)이란 기념비적인 제품을 내놓으며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스티브 잡스(1955~2011)가 한 말이다. 잡스에게 디자인이란 단순히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의 본질 그 자체였다.
 
그렇다고 디자인을 기능적인 면에서만 고찰해서는 안 된다. 기술력을 통해 한 시대의 욕망과 미감(美感)을 형상화하는 작업이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가 지닌 '의미의 격자망'에서 회전된다는 면에서 보면 인문, 즉 인간사의 무늬이기도 하다. 식탁 위의 그릇이나 담뱃갑, 소주 라벨(Label)이나 라면 포장지 등 우리가 일상사에서 접하는 모든 물건에 디자인은 녹아 있다.
 
한국 디자인 역사 연구자가 쓴 이 책은 근대 개화기 이후 130년 동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사물들이 빚어낸 '디자인 연대기'이다. 럭셔리하거나 보존 가치가 뛰어난 물건이 아니라 투박하고 다소 촌스럽더라도 우리가 좋아했고, 그래서 우리 곁에 오래 머물렀던 디자인들을 다룬다. 3가지 카테고리 중 '사물'은 그릇 화장품 패션 전화기 자동차, '정보'는 책 소주 담배 라면 약 과자 화폐 등을 각각 담았다. 간판과 도심 근교 카페도 '환경'으로 분류해 다룬다.
 
대표적인 인스턴트 식품인 라면을 보자. 국내에서 라면이 처음 발매된 것은 1963년 삼양식품의 '三養라면'이다. 닭고기 국물 맛을 낸 일본의 '치킨라면' 포장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했다. '꼬리가 풍성하고 빨간 볏을 가진 닭의 통통한 비닐 몸통'을 두고 책은 '한국인들에게 절실했던 압축적 경제성장을 위한 압축 끼니, 압축 영양의 상징이었다'고 해석한다.
 
1969년에는 주황색 바탕에 짙은 파랑의 동글동글한 글씨로 삼양라면의 포장지가 바뀐다. 이후 1970년대의 라면 포장지 색은 주황으로 통일되며 이는 라면의 '원조 색(色)'이 된다. 색채 심리학적으로 주황은 사랑스럽고 대중적이며 오렌지, 당근과 살구가 그렇듯 입에 군침을 돌게 하는 색이라고 한다. '주황의 독주'는 사진, 인쇄기술이 발달한 1980년대 중반 들어 끝난다. 1986년 '신라면'의 등장과 함께 '열정의 색' 빨간색과 검정이 득세한다. 세태가 더 각박해지고 더 빠르게 변하고 있음을 상징한다는 설명. 1990년대 후반부터는 '웰빙(Well-being)' 열풍과 함께 '수준 높은 삶'과 건강과 고급스러움을 상징하는 흰색 노랑이 라면 포장지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서민의 친구' 소주는 어떨까. 1924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시작된 진로소주는 한국 소주의 대명사이다. 1951년 부산에서 '금련'을, 이듬해에는 '낙동강'을 출하했고 1954년에는 서울에서 '진로(眞露)가 탄생했다. 초창기 소주 상표에는 원숭이가 등장했다. 화려한 색감의 둥근 원 안 풍성한 곡식 단에 둘러싸여 마주 보고 앉아있는 원숭이는 술이 주는 즐거운 교감을 보여준다. 그러다 1955년 두꺼비가 원숭이를 제치고 라벨을 차지한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 ‘은혜를 갚을 줄 아는 두꺼비’의 이미지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후 두꺼비는 배경색과 형태가 변주되면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소주를 대표하는 심벌이 됐다. 1998년 ‘진로’가 우리말 ‘참이슬’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무렵부터 두꺼비는 색채도 옅어지고 존재감이 희미해진다. 환경과 건강 문제가 대두되면서 이슬의 분위기가 강조된 탓이다.급기야 2014년에는 두꺼비는 몸체의 부피가 주는 존재감도 없어지고 대신 구름이 떠가는 전원을 담은 이슬을 지고 있는 달팽이가 등장한다. ‘청정’ ‘그린’ ‘무공해’ 등의 코드가 힘을 얻으면서 벌어진 일이다.
 
디자인된 사물들은 선택받기 위해 시대의 욕망을 다양한 모양과 색채를 통해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책은 디자인을 통해 드러나는 ‘한국인의 삶’을 설명하려 한다. 근대가 시작될 때의 어설픔, 경제발전 시기의 자신감,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 발생 이전 경제 활황 시기의 여유로움 등의 코드를 상품에 담긴 디자인을 통해 풀어내려는 시도라고 하겠다. 가령, 해태제과의 ‘해태 캬라멜’은 전통 상징인 해태를 전면에 내세운 디자인으로 민족성을 강하게 드러냈는데 이는 ‘기업의 성장이 곧 나라에 애국하는 길’이라 여기던 경제발전기의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책은 한국 디자인사에서 ‘숨기고 싶은’ 과거도 건드린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모방’이다. 1950년대 ‘해태 캬라멜’이 일본 모리나가의 캐러멀 디자인을 모방한 후 변형한 것이나, 동아제약의 ‘박카스’가 일본의 ‘리포비탄 D’의 디자인과 흡사한 점 등을 거론하며 이러한 ‘모방의 역사’가 1970년대까지도 이어졌음을 지적한다. 아울러 디자인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된 사례도 제시되는데 주로 정부 주도의 디자인에서 드러난다. ‘반공 방첩’ ‘납세로 자립경제’ 등의 표어를 달고 등장했던 담뱃갑들이나 대통령(이승만)의 초상을 화폐에 사용했던 1950년대 상황 등이 그렇다.
 
부산일보 /박진홍 선임기자 jhp@busan.com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