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권 시인

나로부터 가장 멀어진 생각 하나가 세상의 가장 깊숙한 곳을 찌르는 순간입니다. 순간순간이 끝이고 난간입니다. 끝이고 난간인 순간을 나의 가장 가까운 곳으로 끌어당깁니다. 기억은 아물지 않는 상처들을 오랫동안 꿰매고 있습니다. 저녁이면 어둠에 쌓여 위로를 받는 상처가 새벽이면 다시 곪아 터집니다.
 
무더운 여름날이 지속되면 우리들은 시원한 계곡이나 풍광 좋은 유원지를 찾아갑니다.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족들과 함께 가는 피서야 말로 삶의 재미를 더하는 인간들의 행위이겠지요. 그러나 이 즐거운 행위 다음에는 골짜기 마다 쌓이는 쓰레기가 있지요. 누구는 쓰레기 되가져가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만 궁극적으로 보자면 가져가도 종국엔 어디선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쓰레기는 쓰레기이기 때문에 버려지는 것입니다. 이 쓰레기를 깨끗이 치워야 인간들의 흔적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더러움이 묻히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그 자리에 서있는 나무도, 풀도 마지막엔 자기의 흔적을 지우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그곳에 다시 가도 아름다움만 남기야 때문입니다.
 
이 더러움을 치우고 깨끗함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새벽이면 발광하는 X반도를 차고 세상의 오물을 먹어 치우는 환경미화원이 있습니다.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냄새나고 더러운 쓰레기를 치워야 하는 것이 그들만의 사명인 것입니다.
 
나는 전조등에 비치는 단단한 날개옷의 우화를 봅니다. 덮개를 씌운 청소차 뒤에 착 달라붙어 가는 것이 빛나는 딱정벌레 같습니다. 겨울이면 칼바람도 스며들지 못하게 목장갑에 투구를 쓰고 새벽을 치우고 있습니다. 마치 저곳이 굴러야 하는 개똥밭인 것처럼, 냄새나는 이 동네, 저 동네가 돌아야 하는 곳입니다.
 
야광 더듬이를 추켜세우고 찾아가는 그곳에는 식충이 먹고 버린 껍질이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종류는 무한합니다. 이것을 치우다 보면 몸에는 지울 수 없는 얼룩이 차오릅니다. 몸에 배인 얼룩의 기억이란 한꺼번에 쏟아 버려야 하는 설움이어서, 어둠이 깨기 전에 사나운 천적이 날뛰기 전에 날렵한 자세로 쳐 나가는 것입니다. 몇 번의 탈피로 날이 새는가요?
 
환경미화원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아파트, 사무실, 백화점 등에서 세상의 더러움을 먼저 치우고 닦아내는 것입니다. 출근길에 아파트를 나서다가 마대걸레를 잡은 미화원을 봅니다. 세상의 더러움을 깨끗이 먹어 치우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습니다. 마치 도를 닦고 있는 걸레스님 중광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일필휘지로 그어 나가는 모습이 고즈넉한 사찰의 스님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뚝뚝 떨어지는 땀이 담묵처럼 번집니다. 사람들이 나서기 전에 키보다 큰 장봉으로 쓰고 지우는 마포자루의 힘, 입신의 지경으로 가는 것입니다. 망설임 없이 밀고 가는 저 운필, 하도급의 설움을 지웁니다.
 
쓱쓱 밀고 당기면 허옇게 일어서는 바닥이 있습니다. 선승이 아침 길을 나서듯이 가장 먼저 닦으며 가는 길에 서면 중광이 보이는 것입니다. 모두는 이 사랑을 포기 할 수 없습니다. 아름답고 밝은 미래가 저 길을 밟고 오기 때문입니다.
 
우화란 하찮은 것에서 찬란한 것으로 날개를 낸다는 것이지요. 화려하게 날아오른다는 것입니다. 새벽이면 눈에 불을 켜고 세상의 오물을 먹어 치우는 시간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이 발광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보수도 넉넉하지 않는 일에 묵묵히 봉사하는 분들이 한여름 뙤약볕을 녹이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나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쓰레기는 우리와 공존할 것입니다. 구겨진 시간들의 파편들, 먹고 버린 인간의 껍데기가 검은 재로 남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아름다운 기억도 버리면 쓰레기가 되는 것입니다. 거리에는 쓰레기의 문장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 썩지 않는 시간들을 내가 건너고 있습니다. 쓰레기라고 이름 붙인 것에, 냄새나는 것에, 빛나는 삶에 제물을 바치는 아침이라 이름을 붙입니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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