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여 년 전 '지옥' 크림전쟁
반역 꼬리표 단 채 진실 전달
‘위대한 폭로자’ 된 언론 재조명



전쟁이 발발한 지 4개월 만에 2만 1097명이 사망했다. 이들 중 전투나 전투를 하다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사람은 4774명이었다. 나머지 1만 6323명, 전체 사망자 중 77%는 전투와 상관없는 질병으로 사망했다. 160여 년 전에 일어난 크림전쟁 얘기다. 하지만 전투로 인한 죽음보다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3배나 많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질병에 이어 크림반도에 혹독한 겨울이 닥치자 전쟁 1년 만에 작전 수행이 가능한 병사의 수는 5만 3000명 중 고작 2000명에 불과했다.
 
당혹스럽다고나 할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 이러한 상황은 누군가 글로 써서 세상에 알리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영국의 타임스(The Times)는 하워드 러셀을 종군 기자로 크림반도에 파견,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영국 국민에게 전한다. 책 <펜의 힘>은 1854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4개월 동안 크림전쟁에 참전한 영국군의 전투에 관한 타임스와 정부와의 진실게임에 관한 이야기이다. 역자(譯者)는 부산대 전호환 총장이다. 원서의 제목은 <딜레인의 전쟁:Delane’s War>. 타임스 편집장인 존 딜레인과 종군 기자 러셀이 '펜의 힘'을 빌려 영국 정부를 무너뜨린 과정을 서술했다.
 
부실한 물자 수송과 인력 부족은 물론 지휘관의 무능력과 혼란에 빠진 지휘 체계. 전장은 지옥과도 같았다. 러셀은 크림전쟁의 실상과 무능력한 군부의 현실을 그대로 전한다. 타임스 편집장인 딜레인은 이를 가감 없이 지면에 실었고 지휘관들을 맹비난하는 사설도 서슴없이 게재했다. 1854년 11월 20일 자 타임스에 실린 크림전쟁 관련 기사. '콜레라와 열병은 물론 혹독한 날씨와 과도한 노역으로 인한 사상자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우리 후세들이 이 나라와 현세대를 향해 거침없이 비난을 퍼부을 만큼 명백한 위험에 처해 있다.'
 
이에 영국 정부와 군부는 딜레인에게 반역과 속임수, 과장이라는 죄목을 붙여 입을 막고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딜레인은 이러한 압력에 굴하지 않고 펜의 힘을 빌려 부정한 영국 정부를 무너뜨리고 세상을 바꾼 위대한 폭로자가 된다.
 
책에서 또 하나는 눈길을 끄는 것은 간호사 나이팅게일의 특별한 면모다. 그녀는 160여 년 전 이미 '데이터의 힘'을 보여준 혁신가이기도 했다. 나이팅게일은 야전병원의 끔찍한 진실에 놀란다. 전투로 사망하는 군인의 숫자보다 질병으로 사망하는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이를 단순한 숫자가 아닌 색깔과 면적의 크기를 이용해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도표를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 크림전쟁 중 사상자의 원인을 분석한 이 자료는 그녀가 유능한 수학자이자 통계학자임을 보여준다. 그녀는 "왜 젊은이들이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라며 영국 정부에 야전병원의 위생시설 개선을 요구, 변화를 끌어낸다. 실제 1854년 겨울에는 입원 환자의 43%가 사망했지만, 야전병원의 위생시설을 개선한 후 6개월이 지나자 사망률이 2%대로 크게 준다. 타임스는 간호사의 자격으로 전장의 실상을 지켜본 나이팅게일의 이런 데이터를 바탕으로 생생한 전장의 소식을 전하고 정부의 거짓발표를 반박하기도 한다.
 
내각 사퇴 과정과 정치인들의 거짓 증언, 장성들의 무능함과 거짓 정보, 장병들의 고통…. 책은 그 시대의 슬픈 자화상을 담고 있지만, 무엇보다 언론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 준다. 아울러 '의미 있는 데이터가 새로운 미래를 열어간다'는 사실도.
 
흔히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말한다. 그 의미를 이 책을 통해 제대로 느낄 수 있을 터이다.

부산일보 /정달식 기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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