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 귀족문화 ‘기사도’
근대 시민의식·교양으로 계승 
명분과 절개 숭상한 선비 정신



서양 중세 봉건시대에 기사(Knight)가 있었다. 왕이나 영주, 교회와 주종관계를 맺고 봉건제도를 버티는 축으로 기능했다. <아서왕 전설> <니벨룽의 노래> 등 서양의 옛 문학작품 속 기사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인간형으로 묘사됐지만 그들은 실제론 무기와 갑옷을 독점한 채 평민들을 상대로 약탈을 일삼고 심지어 강간도 마다하지 않는 '폭력집단'이었다. 
 
비슷한 연대에 조선에는 선비(士)가 존재했다.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을 일컫는 말로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말한다. <대학>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 곧 선비의 길'이라고 했다. '스스로 닦고 수양한 후 남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신사와 선비>는 서양의 기사도와 뒤이은 신사도의 특징과 역사를 탐구하고, 이를 한국 전통사회의 주역인 선비와 비교·분석한다. 독일 튀빙겐대 철학 박사로 한국과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며 선비에 관한 다양한 저서를 펴냈던 저자는 "서양 중세의 기사도는 조선의 선비가 사는 법과 상당한 유사점이 있었다"며 "그들은 명예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고, 책임감도 투철했다"고 말한다.
 
책에 따르면 서양 중세 귀족문화의 '정수'로 꼽히는 기사도는 오늘날 '조폭'과 다름없는 행태를 보이며 사회문제로 떠오른 기사들을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기사들이 도덕과 예의를 내면화하도록 함으로써, 사회안정을 꾀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시기 유럽 사회를 지배했던 로마교황청은 기사들에게 도덕적 규범을 충실히 실천하기를 요구했다. 이에 따라 기사는 기독교 신앙에 기초해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을 실천하며 타인에 대한 관용을 베풀겠다고 서약했다. 여성(과부)과 아동(고아)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데 앞장서고 대신 기사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아 아무리 강한 적을 만나더라도 용맹하게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바로 기사도였다.
 
16세기 들어 신형 화기(火器)가 발달하자 기사 계층은 군사적 효용성이 사라지면서 몰락했다. 토대를 잃게 된 기사도는 신사도로 변모했다. 이 시기 작위를 갖지 못하고 기사 계층이 일부 포함된 영국의 향촌 지주 젠트리(Gentry) 계층은 인내심과 근면성, 독창성 등 선대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유지하며 신사도로 발전시켜 나갔다.
 
조선의 선비는 어떠했을까? 저자는 '아름답고, 안타까운 선비의 길'이란 표현을 썼다. 선비는 수기치인과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추구하며 "서양의 기사와 신사, 일본의 사무라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철학적 고원함"을 보였다.
 
그러나 아름다움 뒤에는 짙은 그늘이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오직 성리학만을 경전으로 떠받드는 '성리학 근본주의'가 지배한 결과 '적서차별'과 당쟁, 문체반정과 위정척사 등 심각한 폐단이 발생했다. 조선 후기 혜강 최한기(1803~77)가 '운화(運化)의 기(氣)'를 내세워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적 관찰과 분석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늦은 자각"이었다.
 
저자는 책 후반부에 선비의 역사가 한국 사회의 미래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를 탐색한다. 무엇보다 많은 선비가 조선시대 시골 마을에 살며 서당을 운영하고 이웃 사람들을 일깨워 '공동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긴 점을 주목한다. "조선은 중앙집권적 국가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을공화국'의 연맹체였다"는 서술이 눈길을 끈다.
 
책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낳고 길러준 문화적 토양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세상에는 이른바 '문화적 유전자'라고 불리는 공동의 문화유산이 존재한다"며 "우리가 역사 속 선비의 길을 논의하는 것은 그 유산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강조한다. 선비들은 물질적 욕망을 절제하는 청아한 인품을 가졌고 겸손했다.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쳤고 자연의 고마움을 알아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함부로 착취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인간의 삶은 천지자연의 일부였고, 인간은 결코 자연적 질서의 파괴자가 아니었다. 이런 점들이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란 결론이다. 

부산일보 /박진홍 선임기자 jhp@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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