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체면 세운 허례허식 풍조
실용·유행 좇아 변화하던 시기
당시 지배층 일상 생활 엿보기



머리에 상투 틀어 갓 쓰고, 아랫사람들에게 호통치고, 서책만 끼고 앉아 멋이라곤 찾아볼 길 없고, 가난해 끼니를 때우지 못해도 남에게 절대 굽실거리지 않고 꼿꼿하기 이를 데 없는…. 흔히 TV 사극이나 영화 등에 등장하는 양반의 모습이다. 한데 우린 이걸 양반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이게 정말 조선시대 양반의 본 모습일까?
 
이걸 알고자 하는 데 있어 조선시대 최초의 세시풍속지인 유득공(1748~1807)의 <경도잡지>는 매우 유용하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18~19세기. 이 시기는 정치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다양한 변화를 겪은 시기였다. <경도잡지>는 당시의 지배층이었던 양반, 특히 조선의 중심지였던 서울 지역의 양반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잡지>는 바로 <경도잡지>에 기록된 원전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다. 이를 통해 양반들의 삶과 그에 관련된 것들의 유래, 취향 등을 짚어보고 그동안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실상을 낱낱이 파헤친다.
 
이 책은 조선시대 양반의 차림새, 그중에서도 남성 양반의 쓰개부터 살펴본다. 복건, 방관, 정자관, 동파관 등 그 종류도 다양한데 제각각 때와 장소에 따라 구분하여 썼다고 한다. 우선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한가로이 노닐 때 복건을 착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퇴계 이황은 복건을 중들이 쓰는 두건과 같아서 선비나 학인이 쓰기에 적절치 않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1000원권 지폐에는 복건 차림을 한 이황의 초상이 들어 있다. 이는 사상·문화사적으로 깊이 따져보아야 할 문제라고 책의 저자는 말한다.
 
책은 양반의 체면 중시, 허례의식도 엿본다. 그들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말을 타더라도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견마잡이를 붙여야 체면이 섰다. 혼례 때 신랑이 백마를 타고, 과거 급제자가 삼일유가(三日遊街)를 치르는 것 또한 축하하는 의미를 뛰어넘어 당시의 허례허식 풍조가 얼마나 만연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남들보다 더 고급스러운 것, 더 값비싸 보이는 것, 더 특별한 것을 갖고 싶다는 사람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18~19세기 서울 양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엔 꽃이나 나무, 애완동물, 담배, 악기 같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칼, 과일, 그림, 수집품, 표구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진 마니아층도 있었다.

 
담배와 관련된 욕망을 보자. 체면 때문에 품위 없이 쌈지 따위를 갖고 다닐 수 없다고 생각한 양반들은 쇠로 만든 담배합에 은으로 매화나 대나무를 장식하고, 자줏빛 사슴 가죽으로 끈을 달아 담뱃대와 함께 말 꽁무니에 달고 다니면서 멋을 부렸다. 담뱃대를 걸어놓는 연관대, 담뱃대를 청소하는 찔개와 꼬질대, 담배를 빤 후 침이나 가래를 뱉는 그릇인 타구나 재떨이 등도 명품을 추구하는 양상이 심화되었다.
 
명품을 선호하고 유행을 좇다 보니 양반 사회의 사치 풍조가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한 세태를 비판하거나 일침을 가하는 목소리도 함께 터져 나왔다. 이는 곧 신분제 사회가 무너지고 개인의 행복을 더 중시하는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전조이기도 했다.
 
저자는 "조선 후기, 특히 18~19세기는 권위적이고 형식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개인의 취향과 행복이 더 중시되는 시대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다"고 말한다.
 
왕조시대의 종말과 양반의 몰락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 언뜻 사소해 보이지만 너무 가까워서 쉽게 느껴지지 않는 일상적인 변화와 함께 조선은 서서히 격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권위와 격식, 체면을 앞세웠던 양반들이 점차 실용과 효용, 유행을 따르는 모습을 보면서 변화하는 시대를 읽어가는 역사 읽기의 재미를 한껏 맛볼 수 있다.
 
부산일보 /정달식 기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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