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 대한민국역사문화원은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여성 독립운동가 202명을 새롭게 발굴해 발표했다. 구명순, 김필애 등 김해의 여성독립운동가 2명이 포함됐지만 아직까지 이들의 사진은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김해뉴스와 삼일동지회는 100년 전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이들에 대한 기록과 사진을 갖고 계신 분이나 유족들의 연락을 기다린다. 사진제공=삼일동지회 김해지회

 
보훈처, 잊혀진 독립운동가 확인
독립만세·항일운동 등 주도
삼일동지회 “자료수집 나설 것”


 
일제 식민통치에서 자주독립을 되찾은 광복절이 73회째를 맞았다.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걸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선조들이 있었기에 누릴 수 있는 광복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진 한 장도 남아있지 않은 채 역사 속에 묻혀있는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려는 정부와 단체들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김해 여성 독립운동가 2명이 재조명돼 지역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대한민국역사문화원은 국가보훈처의 의뢰로 '여성독립운동가 발굴 및 포상 확대방안 연구 용역'을 실시해 여성 독립운동가 202명을 새롭게 발굴했다고 최근 발표했다. 이 중 구명순, 김필애 등 2명이 김해의 여성 독립운동가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해시에서 파악하고 있는 김해의 애국지사는 85명이며 국가보훈처에서 유공자 포상을 받은 김해 출신 애국지사는 48명이다. 유공자 포상을 받은 애국지사 중 단 한 명만이 여성일 정도로 여성 독립운동가는 많이 드러나 있지 않은 상황이다.
 
국가보훈처가 이번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구명순은 김해 읍내 3·1만세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김해 동상동 출신으로 서울 정신여학교 학생이었던 그는 20세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보고 이를 모방하여 김해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행하려 했다.
 
김해의 독립운동 시위는 기독교 계통 청년들이 주축이 됐는데 김해교회 설립자인 배성두 장로의 아들이며 세브란스의전 학생이었던 배동석이 서울 탑골공원에서 3·1운동에 학생대표로 활약한 후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귀향한 것으로 시작됐다. 그는 3월 29일~30일 밤 김해군청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으며, 같은 교회였던 구명순 역시 2차 시위에서 김해교회 부녀자 8~9명과 함께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매일신보는 이 만세운동에 50~70명의 인원이 모였다고 당시 보도했다. 구명순은 시위 직후 체포돼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며 40일가량의 옥고 끝에 같은 해 5월 10일 방면됐다.
 
또 다른 인물인 김필애는 3·1운동을 비롯해 경남지역에서 눈에 띄는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24세의 나이로 경남 마산 의신학교 교사였던 그는 학교 교원, 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추산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등 마산지역에서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1919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경상남도 지부,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과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1928년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 핵심 인물로 참여하는 등 만세운동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조선청년총동맹에 참가했던 정종명, 김필애, 오수덕 이외 여러 여자는 ‘조선 종래의 여자는 유약하였으나 장래는 결단코 남자에게 속될 것이 아니다’는 주장으로 여성동우회를 조직했다." 당시 매일신보 기사가 밝히고 있듯 김필애는 항일운동뿐 아니라 신여성운동 교육 및 훈련, 강연회를 진행하며 여성인권 신장에 힘쓰기도 했다.
 
김해 애국지사 발굴에 앞장서고 있는 삼일동지회 김해지부 이광희(김해 시의원) 지부장은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가 발굴됐다는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 지금은 사진자료도 없는 상황이지만 유족 찾기, 자료 수집을 펼쳐나갈 예정이다. 이후에는 이들에 대한 유공자 포상도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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