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과 5년 함께한 이야기
위안부 문제 기폭제 역할 그림들
상처와 염원 그림으로 쏟아내
14일 충남 천안시 국립 망향의 동산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념식이 정부가 주관하는 첫 행사로 열렸다. 기림의 날인 8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지난 1991년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 증언한 날이다.
할머니의 증언 이후 전국의 생존자들이 잇따라 피해 사실을 알렸고, 이일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인권 문제로서 국제사회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또 2017년 12월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올해부터 그 행사가 정부 주관으로 열리게 됐다.
이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고 국가기념일로까지 지정된 과정에는 감추고 싶은 뼈아픈 피해 사실을 공개하고 나선 피해자 할머니들의 용기 있는 증언의 힘이 컸다. 이 책은 1993년부터 1997년까지 5년 동안 피해자 할머니들의 미술 선생이었던 작가가 할머니들이 함께 모여 사는 나눔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한 미술 수업 이야기다. 또한 긴 세월 감춰뒀던 깊은 상처와 간절한 염원을 그림으로 쏟아내며 과거의 아픈 기억과 마주했던 할머니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하얀 캔버스 위에 펼쳐낸 영혼의 떨림과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는 피해 사실들은 작가의 글과 그림을 통해 더욱 또렷이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저자가 피해자 할머니들과 보낸 시간을 기록하게 된 계기는 2015년 12월 28일 이뤄진 우리와 일본 정부 사이의 '한일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였다. 할머니들은 피해자들의 의사는 무시한 채 합의를 진행한 한국 정부와 여전히 공식 사과와 법적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일본 정부에 분노했다.
할머니들은 그림을 그리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받은 깊은 상처와 고통을 조금씩 드러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문제의 본질을 세상에 알리려 했다. 어눌한 선으로 그려진 꽃들과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는 소녀, 삐뚤삐뚤하게 묘사된 군인들의 모습. 마치 아이들이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피해자 할머니들의 그림 속에는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 담겨 있다.
그러한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젊은 미술 선생의 생생한 수업 진행 기록이 바로 이 글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역사책이나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려주는 증언집이 아니다. 할머니들과의 서먹했던 첫 만남부터 난생처음 붓을 잡아본 할머니들의 순탄치 않은 그림 배우기 과정, 할머니들이 그림을 통해 자신들의 상처와 직면하고자 노력한 모습들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온갖 망설임과 떨림을 이겨내고 하얀 캔버스 앞에서 과거와 마주한 할머니들의 사연들은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그 어떤 소설이나 영화들 못지않게 읽는 이의 가슴을 조여오고 아리게 한다. 고(故) 강덕경 할머니의 '빼앗긴 순정'과 '책임자를 처벌하라', 고(故) 김순덕 할머니의 '못다 핀 꽃'과 '끌려감' 등 이미 잘 알려진 그림들이 그려지게 된 배경과 숨은 이야기를 알고 나면 그림의 울림은 배가 된다.
할머니들의 그림은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 알려진 이후 한일 과거사 문제, 여성 인권의 문제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에서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림이 그려진 과정과 그 의미를 최초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큰 의미를 갖는다.
저자는 "할머니들은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성장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선물 받은 듯 맑게 빛났다. 상처투성이의 할머니들이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라는 고통을 딛고서 새로운 삶에 도전하며 열정을 불태웠던 순간을 전하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할머니들의 용기와 마지막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를, 할머니들의 그림들이 독자들의 삶을 위로하고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말도 울림이 크다.
부산일보 /백태현 선임기자 hyu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