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 시내 어디에서나 바라다보이는 '분산'은 김해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맨 첫머리에 놓여야 마땅한 산이다. 분산에서 원도심을 내려다 보면 멀리 김해평야가 보이는데, 김해평야는 기실 저 옛날 가야 적에는 바다였던 곳이다. 오른쪽 맨 앞에 놓여 있는 산은 임호산.

1997년 복원 봉수대 오르면
눈 아래로 낙동강·남해바다
옛날 바다였던 평야·시가지
파노라마 같이 펼쳐져 보여


김해시 승격 당시만 해도 10만이 채 안됐던 김해 인구가 어느덧 50만을 넘어섰다. '토박이' 김해 사람들과 들어 온 사람들이 '김해'라는 용광로 안에서 서로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공동체 의식이 희박하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김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장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김해의 땅 덩어리와 거기에 얽힌 역사적 사연, 그리고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무대를 돌아보는 첫 걸음으로 향할 곳에 김해의 진산인 분산(盆山) 만한 곳이 없다. 분산은 김해의 한 가운데 듬직한 무게로 눌러 앉아 우리 마을의 중심을 잡아 주는 산이다. 분성산(盆城山)으로 불리기도 하여 서쪽으로 해가 낮아지는 오후에 시내 쪽에서 올려다 보면 새로 고쳐 쌓은 성벽이 밝게 빛나기에 '분성이 있는 산' 쯤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은 '분산성'이고, 원래 '분성(盆城)'은 다른 데 있었다.

 

   분성은 수로왕의 왕궁이 있었던 봉황대를 밖으로 두른 평지의 토성이었다. 이 분성이 김해를 대신하는 이름이 되었던 까닭에 '분성에 있는 산' 이라 해서 분성산으로도 불렸던 모양이다. 분성, 곧 김해의 산이라면 분산(盆山)을 가리켜 왔다는 유래만 보아도, 김해의 땅과 역사 이야기의 첫머리에 분산이 자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김해를 상징한다는 의미도 크지만, 시민들의 친근한 등산지로서 사방팔방으로 나 있는 등산로는 언제나 시민들의 발길들로 그득하다. 서쪽의 동상동 쪽에서 서재골 남재골 등으로 오르는 산책로 같은 길도 있고, 남쪽의 활천고개 정상에서 시작해 능선을 따라 올라 만장대의 턱 밑에 이르는 제법 등산로다운 길도 있다. 동쪽에서는 어방초등학교 뒤로 오르는 길이 가깝지만 경사가 급하고, 가야랜드 쪽으로는 가야역사테마파크 근처까지 차로 오를 수 있는 편한 길도 있다.

 

▲ 1997년에 복원된 봉수대

지난 1997년에 복원된 봉수대 위에 서면 눈 아래로 남해 바다와 낙동강, 드넓은 김해평야와 장난감처럼 보이는 시가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지금은 전혀 새로운 돌을 다듬어, 전혀 새롭게 만들어 올린 봉수대가 자리하고 있지만, 원래는 아주 큰 평상처럼 넓적하고 평평한 바위가 펼쳐져 있어, 앉아서 바람이라도 쐬면 마치 신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되었다.

역사기록이 전하는 분산봉수(盆山烽燧)는 남해 가덕도 쪽에서 오는 신호를 받아 북쪽 밀양으로 전하는 역할의 일부를 담당했던 봉화였다. 그러나 흔적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던 탓에 해은사 뒤쪽 아니면 이 바위 위에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각각 있었고, 현재 시내의 동서 양쪽 모두에서 잘 보인다는 이유도 한몫하여 지금 자리의 복원이 결정되었다. 여기서 새삼스럽게 위치결정에 대해 시비할 생각은 없으나,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아 시원한 바람과 함께 김해의 전경을 내려다 보던 호연지기를 다 잃게 된 아쉬움은 필자 혼자만의 감상은 아닌 듯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황금물결을 이루던 김해평야가 가을걷이를 마쳐 약간은 황량한 들판으로 변해가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김해를 연상하는 브랜드를 꼽으라는 조사에서 김해평야는 언제나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중요 아이템이다. 김해에서 자라지 않았던 필자 역시, 지리교과서에서 김해평야와 김해의 특산물로서 쌀을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의 역사학과를 다닐 때만 해도 '김해평야의 높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일찍이 가야왕국이 발전하였다'라 쓰면 백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학생들이 그런 답안을 쓴다면 빵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가야시대는 물론 조선후기까지도 김해평야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발아래 저만치로 내려 다 보이는 죽도(竹島)와 덕도(德島) 등이 그 증인들이다. 지금은 김해평야 한 가운데에 녹색으로 솟아 있는 작은 언덕들이건만, 그 이름에는 아직도 섬이었던 과거가 남아있다. 죽도는 '난중일기'에도 등장한다. 난중일기를 보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녹산 쪽의 욕망산에서 죽도에 정박하고 있던 왜의 나베시마(鍋島) 수군을 정찰하고 있다. 시대를 거슬러 고려 말에는 김해읍성 바로 앞 갈대숲에서 갑자기 왜구가 튀어나와 미처 방비할 틈이 없었다고도 하고, 허왕후의 도래를 기념하는 배젓기 경주대회가 고려시대까지 계속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서도 남해의 해운에서 생기는 이익 모두를 김해가 차지한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조선후기까지도 김해는 남해안의 최대 항구였음을 알 수 있다. 김해의 바다 '해(海)'에는 '옛 김해만'이라는 지리적 환경과 국제적 항구도시로서의 전통이 남아있는 셈이다.

실상 김해시민들에게 분산 꼭대기는 만장대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하다. '만 길이나 되는 높은 곳'이라 하지만, 해발 350 정도의 만장대가 그렇게 높은 곳은 아니다. 흥선대원군이 왜적의 침입을 막는 전진기지로서 김해의 공적을 치하하느라 내려준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봉수대 뒷쪽으로 돌아가면 커다란 병풍바위에 '만장대(萬丈臺)'라 쓴 대원군의 친필 글씨가 그의 도장과 함께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렇게 조금은 과장된 휘호를 내려 준 데에는 사적인 동기도 작용했던 것 같다. 압록강 이남 제일의 바둑실력이라 '녹일(綠一)'이라 불렸던 김해 출신의 인물이 있었는데, 대원군은 그를 자주 불러 수담을 나누었다 한다. 바둑을 좋아하던 대원군이 김해에 플러스알파의 칭찬을 내렸을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는 일이다.

봉수대 오른 쪽에 있는 나무 한 그루는 시내 쪽의 시선을 가리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지만, 봉수대의 복원 이전에는 김해 시내 어디에서 올려다 보아도 혼자서 도드라져 양송이처럼 예쁘게 보이던 만장대의 표식수였다. 김해를 방문하는 타지 사람들에게는 분산에 오르지 않아도 쉽게 만장대를 가리켜 줄 수도 있었던 나무였다. 지금도 나무 아래 암벽에는 '하늘은 만장대를 낳았고, 나는 천년수(千年樹)를 심는다' 라는 석각이 새겨져 있어 예사스러운 나무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나무 아래로 펼쳐지는 장난감도시같은 시가지가 2천 년 전 수로왕이 가락국을 세웠던 왕도(王都)다. 높게 솟은 임호산 앞으로 봉황대와 수로왕릉이 보인다. 내년 4월 개통을 앞둔 경전철의 시운전 모습도 보이고, 수로왕 나시라고 빌기 위해 아홉 촌장이 목욕재계하던 해반천도 보이고, 엄청나게 부푼 내외동의 아파트 숲과 눈에 띄게 붉은 양판점 네온 앞으로 '가야문화의 거리'와 '국립김해박물관'의 둥근 지붕도 보인다.

 

▲ 각종 비석이 서 있는 충의각

이렇게 시원하고 아름다운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분산은 김해의 오랜 역사와 수많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아울러 품고 있는 어머니 같은 존재이다. 만장대를 뒤로 하고 북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대원군의 은혜를 만세토록 잊지 않겠다는 비, 고려 말에 분산성을 쌓았던 박위(朴威)의 공적을 기리는 비, 조선시대에 분산성을 보수했던 김해부사 정현석(鄭顯奭)의 은혜에 감사하는 비가 나란히 서 있는 충의각이 있다. 바다에서 온 허왕후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해은사(海恩寺)에는 가장 오래된 허왕후의 영정이 있다.
해은사를 지나면 분산성의 북문 터를 나서게 되는데, 북문을 나서 밑에서 올려다보는 성벽은 정말 매력적이다. 넝쿨로 덮이고 이끼가 피어 고색창연한 성벽은 허물어진 대로 좋고, 극성스러웠던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성돌 하나하나를 짐 지어 날랐을 이들의 피땀이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알싸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비록 시청률 면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소외되어 왔던 가야의 역사가 드라마로 제작되어 처음 공중파를 탔던 '김수로'의 촬영지는 이제 '가야역사테마파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신라의 '밀레니엄파크'나 백제의 '백제역사문화재현단지'에 비해 다소 옹색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즐겁고 충실한 프로그램의 운영을 통해 우리 고장의 명함인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잘 전파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테마파크를 지나 다시 언덕을 오르면 천문대가 되지만, 여기서 길은 좌우로 갈리는데, 오른 쪽 아스팔트 포장의 자동차 길은 가야랜드 쪽으로 내려가고, 왼쪽 콘크리트 포장의 임도는 동상동 쪽 시내를 향해 내려가는 길이 된다.

요즈음 필자가 다니기 시작한 남재골 약수터에는 누군가 첫 새벽에 했을 빗자루 질 자국이 언제나 선명하다. 분산 자락에는 인제대학교를 비롯하여 많은 중·고등학교와 초등학교가 있다. 약수 물 한 잔하고 내려가는 길 근처 학교에서 아이들 글 읽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그날 하루는 마냥 행복할 것 같다.

수로왕과 '여뀌'에 얽힌 사연 ──────
좁고 기다란 잎 모양 닮아 김해로 도읍

 

▲ 여뀌

분산의 서재골 쪽 세류를 따라 난 좁은 길을 들어 선지 얼마 안 되어 발밑에 깔릴 정도로 키도 작고, 가지와 꽃 모두가 엉성해서 눈에 잘 띄지도 않으며, 연분홍색 꽃이 피기는 해도 작은 알갱이같은 꽃이 몇 개 세로로 달리는 정도라서 꽃인지 풀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든 식물이 있다. '여뀌'라는 이름의 좁고 기다란 잎을 가진 한 해 살이 풀이다. 원래는 수변식물로 평지보다 낮은 강이나 습지 또는 시냇가에서 자란다. , 6~9월 동안 번갈아 가며 꽃이 달리는데, 9월이 되면 녹색 가지도 붉은 색으로 변한다. 덩치 큰 분산을 둘러보는 길에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풀 하나의 이야기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도 않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 '여뀌'가 수로왕이 김해를 가락국의 서울로 정할 때, 김해 땅의 특징과 지리적 이점을 형용하는 비유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수로왕은 김해를 가락국의 서울로 정하면서 "여뀌 잎처럼 좁은 땅이지만, 하나에서 셋이 나고, 셋을 넣으면 일곱이 되는 아주 길한 땅이다"라 하였다. 좁고 기다란 여뀌 잎의 모양에 김해의 땅을 비유하였고, 다닥다닥 달라붙어 번갈아 가며 꽃을 피우는 것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비유한 모양이다. 저 넓은 김해평야가 있었거나 해상무역의 이익을 예견하지 못했다면 이러한 비유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여뀌'는 물고기를 잡는 데 쓰일 정도로 쓴 맛이지만, 지혈이나 어혈 제거에 유용한 식물이다. 건국의 어려움을 견뎌 내고, 가락국의 번영을 예견했던 비유였을 것으로도 생각되는 대목이다. 과연 2천 년 전에 수로왕은 오늘의 우리들처럼 분산에 올라 바다에 맞닿아 있는 김해 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가락국의 서울을 정했던 걸까?

 

 

 

 


이영식_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 인제대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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