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인들이 나아가녁에서 생일잔치를 하고 있다.

 

족발 묵 홀로데츠, 말랑말랑한 식감의 샐러드
빨간 국물의 보르쉬 감칠 맛 나는 대표음식

고려인 3세 주인 마음씀씀이도 토종 한국인
고려인 애환 담긴 소고기국도 현지에서 인기

굴라쉬는 우리나라 소고기찜과 비슷
생크림 발효시킨 스메타나 음식에 자주 등장




다른 나라 음식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다는 건 작은 즐거움이다. 러시아 음식도 그렇다. 이국적인 이름에다 그만큼 낯선 맛을 가진, 형형색색의 요리들을 따분한 일상 속에 문득 초대하는 것이다. 김해시 서상동 김해중앙상가 인근에 있는 러시아 식당 '나아가녁'은 그런 작은 일탈을 경험하기에 충분하다. 시내 여느 밥집 같은 수수한 분위기에다 부담 없는 가격이어서 입구를 들어서며 쭈뼛쭈뼛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나아가녁이 무슨 뜻인지 묻자 주인 장 알레브티나(51)는 어눌한 한국말로 뭔가를 열심히 설명해준다. "멀리서 와서…따뜻하게 맞아주는…빛 같은 거". 장 씨는 고려인 3세다. 일제강점기 북간도에 살던 장 씨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동포들과 함께 소련 당국에 의해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됐다. 가족들은 장 씨가 5살 때쯤 러시아 볼고그라드(옛 스탈린그라드)로 옮겨 터전을 잡았다. 핏줄은 속일 수 없다. 장 씨는 곁보기에 영락없는 한국의 중년 아줌마다. 사고방식과 마음 씀씀이도 그렇다. 서툰 한국말만 빼고. 뒤에 알아보니 나아가녁은 러시아어로 '빛을 위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음식점 이름이라 하기에는 좀 우아하지만 어쨌든 사람들에게 희망 같은 걸 주고 싶은게다.
 

▲ ‘모피코트를 두른 청어’ 샐러드. 생선모양으로 만든 것은 주인의 아이디어다. 대중적 음식인 블린(오른쪽).

먼저 접한 음식은 샐러드 세 종류다. 러시아에서 명절이나 잔칫날 꼭 만들어 먹는 전통음식이라고 한다. 그만큼 제각각 러시아식 개성이 뚜렷하다. 우선 '모피 코트 두른 청어'. 모양과 색깔이 이름만큼 이채롭다. 주 재료는 소금에 절여 삭힌 청어다. 숙성된 생선살을 발라 삶은 감자와 당근 양파 등과 함께 으깨 마요네즈로 버무린다. 그 위에 비트를 간 붉은 즙을 끼얹고 삶은 달걀 노른자 가루를 뿌렸다. 원래 러시아에서는 재료들을 층층으로 쌓아 올린 둥근 케익 모양으로 만든다는데, 장 씨는 이를 생선 모양으로 재미있게 변형했다. 우선 보기에 흰색과 붉은색 그리고 노란색의 대비가 강렬한데, 한 입 먹어보면 삭은 청어의 맛이 살짝 입 안을 스친다. 이 기묘한 무거움을 마요네즈와 감자, 그리고 야채들이 중화시키면서 독특한 샐러드 맛으로 만들어낸다. 
 
그 옆에 놓인 것은 홀로데츠라는 샐러드. 얼핏 우리나라의 묵처럼 생겼다. 소고기와 족발을 잘게 찢어 소금 마늘 고추 등 양념과 함께 몇 시간 푹 고은다. 국물이 짤박해질 정도로 졸인 뒤 이를 냉장고에서 식혀 젤리처럼 만든 것이다. 이를 러시아산 겨자소스에 찍어먹는다. 맛만 따진다면 곰탕이나 족발 맛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주 매운 겨자가 입 안을 개운하게 한다. 
 
올리비에 샐러드는 위의 두 샐러드에 비하면 모양이나 맛이 좀 점잖은 편이다. 닭가슴살과 감자 계란 햄 양파 등을 삶아 마요네즈에 버무린 것이다. 예상대로 고소하면서 아삭한 맛을 전해준다. 
 

▲ 소고기찜 요리인 굴라쉬(왼쪽), 러시아의 대표적인 수프 보르쉬.

러시아에서 식사할 때 샐러드 다음에는 수프가 나온다. 러시아 수프 중에서 보르쉬가 잘 알려져 있다. 소고기를 주재료로 감자와 양파 양배추 당근 등의 야채를 넣고 끓이는데 여기에 반드시 빨간 무나 비트가 들어간다. 그러니까 국물이 빨갛다. 그런데 그 위에다 흰색을 띤 스메타나를 구름처럼 살짝 얹었다. 스메타나는 생크림을 발효시킨 것이다. 우리나라의 된장처럼 러시아의 음식 곳곳에 널리 쓰인다. 발효된 생크림, 맛이 어떤 지 짐작될 것이다. 시큼 털털하다고 할까. 이를 수프 국물에 녹여 먹는 것이다. 물론 거부감이 들면 이것만 살짝 덜어내면 된다. 
 
러시아 수프 중에 소고기국이 있다. 고려인들의 애환이 담긴 음식이다. 소고기와 마늘 양파 고수 등을 넣고 끓인 맑은 국인데 밥을 따로 담아내 국과 함께 먹는다. 국과 밥 그리고 작은 종지에 담긴 양념으로 차려진 한 상이 오래오래 고려인들의 향수를 달래주었을 것이다.  
 
장 씨는 러시아에 있을 때 요리사로 일했다고 한다. 음식이나 빵을 만들어 마트 같은 거래처에 납품하는 큰 식품회사의 부장이었다고 한다. 12년 전 오빠 언니들과 함께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국에 들어왔다. 안산에서 회사에 다니다가 김해로 와서 5년 전 '나아가녁'을 열었다. 요리는 자신이 있었지만 한국말이 서툴러 오랫동안 망설였다고 한다. 
 

▲ 러시아식 만두인 펠메니.

러시아의 가정에서 만들어 먹는 대중적인 음식으로 굴라쉬와 커틀렛이 있다. 굴라쉬는 소고기와 양파 당근 토마토 등을 양념해서 두 시간 정도 푹 삶은 소고기 찜요리다. 요리할 때 물을 넣지 않고 야채에서 배어 나온 즙으로 삶기 때문에 소스의 맛이 무겁고 진하다. 접시 한쪽에는 우유를 넣고 으깬 삶은 감자를 담아 고기와 함께 먹는다. 커틀렛은 소고기와 양파를 다져 함박스테이크처럼 두텁게 구워낸 것이다. 나아가녁에서는 그 위에 치즈를 덮기도 한다.  
 
팬케이크의 일종인 블린도 빼놓을 수 없는 서민음식이다. 우유와 계란 등을 넣은 밀가루 반죽을 얇게 구워 그 위에 소고기나 치즈, 연어, 캐비어 등등을 취향대로 올려 먹는다. 러시아 사순절 축제기간 중에 사람들이 즐겨 먹다고 하니까 그만큼 대중적이다. 
 
러시아 전통 만두인 펠메니는 우리나라 만두와 모양과 맛이 비슷하지만 밤톨만한 크기여서 좀 작다. 만두소로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쓰는데 야채는 넣지 않거나 양파만 넣기도 한다. 펠메니도 생크림을 발효시켜 만든 스메타나에 찍어 먹는데 이 것에 익숙하지 않은 고려인들은 대신 간장+고추가루 소스에 찍어먹는다고 한다.  

김해뉴스 /이정호 선임기자 cham4375@


▶나아가녁 : 김해시 가락로 94번길 2-1. 055-338-3013.
모피 코트 두른 청어(250g) : 5000원, 굴라쉬 : 9000원, 커틀릿 : 8000원, 펠메니 : 8000원, 소고기 국밥 : 8000원, 가지 롤(250g) : 6000원, 샤슬릭(꼬치) :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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