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는 곳”
 2년 걸쳐 전국 26곳 암자 찾아
‘읽는 책’이자 ‘보는 책’ 펴내



소설가 정찬주의 산문집 '암자로 가는 길'이 있다. 이 책은 스테디셀러로, 1990년대 중반 한 일간지 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엮은 것이다. 한데, 우리는 이 책의 저자는 쉬 기억해도 책 속에 등장하는 사진은 누가 찍었는지 잘 모른다. 그 사진 작업에 참여한 이가 바로 '글 쓰는 사진가' 김홍희다.
 
그가 '암자로 가는 길' 연재 이후 23년 만에 다시 암자를 찾아 그 여정을 기록한 책을 펴냈다. 이름하여 '상무주 가는 길'. 상무주는 단순하게 보면 책 속에 등장하는 함양 지리산 상무주암자를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지명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불교에서 무주(無住)는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던가. 제목이 책의 내용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암자를 찾을 땐 마치 모든 걸 내려놓고 가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책을 볼 때도 분명 이런 마음이 생기리라.
 
작가 김홍희는 작심하고 2년에 걸쳐 혼자 모터사이클을 이용해 암자를 올랐다고 했다. 그게 26곳. 여수 향일암·구례 사성암·합천 원당암·경주 칠불암·고창 도솔암·변산 지장암·동해 관음암…. 전국을 누볐다. 작가는 "정신없이 바쁘게 활동하던 어느 날 문득, 어떤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을 좇아 암자를 오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3년 전 사진을 찍었던 그때처럼 그 암자들은 거짓말처럼 그대로였다. 나무·바위·돌·물·하늘·스님… 매번 같은 풍경으로 펼쳐지는 암자를 오르고 또 올랐다. 그리고 오롯이 그 풍광을 담아냈다.
 

▲ 구례 사성암

 
암자로 가는 그 길. 그곳은 모든 것이 정지된, 마치 돌처럼 흐르는 시간이었다.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카메라도 버리고 남은 한 자루의 펜도 버릴 수 있는 '무상(無想)의 마음'과 대면할 수 있었다. 그게 변산 내소사 지장암에서였다. 그는 "버려야 할 것과 함께 사는 것이 우리 현대인의 삶"이라며 "더 버릴 것이 없을 때, 봄나무와 봄꽃의 거름이 되듯 그렇게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내려놓아서일까? 그즈음 육신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대장암과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우울증에서도 말끔히 벗어날 수 있었다.
 
책엔 김홍희 특유의 번뜩이는 글과 함께 세심한 감성으로 포착한 100여 컷의 흑백사진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읽는 책'인 동시에 '보는 책'인 셈이다. 고집스러운 사진가 정신, 장인의 뚝심이 느껴지는 사진들. 글은 글대로 사진은 사진대로 배치했다. 글과 사진은 서로 섞이지 않으면서 절묘한 조화를 빚어낸다. 읽는 맛이 보는 맛을 돋우고, 보는 맛이 읽는 맛을 부른다. 펼친 곳이 앞이거나 뒤거나 중간이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느 페이지를 먼저 열고 보더라도 자연스럽게 '상무주를 향한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작가는 모태신앙이지만 1년에 겨우 한두 번 교회에 나가는 소위 '크리스마스 크리스천'이다. 그런 그가 암자를 순례하며 인간 예수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또한 부처님을 향한 사랑도 더욱 깊어졌다고 털어놓는다. 이렇듯 저자의 글쓰기는 경계가 없다. 애써 꾸미지 않고 숨기지 않는다.
 
잠깐 여수 금오산 향일암을 보자. '향일암은 해가 있는 동안은 하루 종일 눈이 부시다. 하나는 하늘의 해, 또 하나는 바다의 반사 때문이다. 하늘의 해보다 바다의 반사가 훨씬 심하다.'
 
작가는 있는 그대로 자신의 감성을 끌어내며 암자의 존재 이유를, 사람이 살아가는 일을 정직하게 풀어놓는다. 그리고 나머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흑백사진은 돌처럼 천천히 흐르는 암자의 시간을 형상화하며 가슴 깊이 진한 여운으로 다가온다. 추억을 쓰다듬고 아픔을 건드리면서도 진정한 위안의 손길을 내민다.
 
저자는 암자를 이렇게 얘기한다. "버릴 것이 없는 곳. 다 버린 곳.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는 곳"이라고. 흑백의 암자 풍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집착하지 말고 내려놓으라고.
 
부산일보 /정달식 기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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