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인 줄 알았다. 생수통을 배달하는 모습이 활기차고 단단해 보여 막 일을 시작한 사람인 줄 알았다. 막상 이야기를 터놓고 보니, 이승희 씨는 장년의 나이(42)였다.
인생유전이 만만치 않았다. 좋은 책을 만들어내는 꿈을 간직한 그는 현재 영어교재 1인출판사를 운영하며, 책을 만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생수를 배달하고 틈나는대로 아르바이트도 한다. 김해 부원동, 안동, 삼정동 등지에서 생수통을 배달하는 이 남자를 만나면 "어떤 책을 만들고 있어요?"라고 한번 물어보라. 아마도 자신이 만들고 있는 책, 만들고 싶은 책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이다. 머리 속이 온통 책으로 가득한 이승희 씨의 '힘들지만 유쾌한 책 만들기 인생 프로젝트'를 들여다보자.

이승희 씨는 서울의 대학에서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중 출판사로 이직했다. 한 지인의 권유였다. 이 일은 이승희 씨를 단숨에 책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운명적 계기가 되었다. IMB교육연구소 등 어학교재 전문출판사에서 출판과 총판영업을 경험하는 동안 이 씨는 '내 방식대로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다.
 
이 씨가 생각하는 영어 교재는 '좋은 텍스트 위주로 충실하게 만든 책'이다. "아시다시피 많은 영어책들이 비주얼 중심 편집이에요. 일러스트가 너무 많아요. 그런 걸 넣을 자리에 좋은 예문이나 단어 하나를 더 넣어 텍스트가 탄탄한 책, 그게 제가 만들고 싶은 책입니다."
 
그러나 이미 기존의 형식에 길들어져 버린 독자들은 이 씨의 책을 낯설어한다. "그림이나 사진도 좀 넣고, 팔리는 책을 만들어보라"는 의견도 듣고 있다. 그러나 이 씨는 현재까지 3권의 문법책을 만드는 동안, 유행하는 편집방식에 영합하지 않았다. 팔리는 책보다 좋은 책을 만들자니, 당장 책의 제작비용을 마련하는 게 급했다.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1인출판을 시작하면서, 퇴직금도 슬슬 바닥났다. 이 씨는 지난 2년동안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책을 만들어야 하니까, 취직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르바이트를 할 수 밖에 없지요. 지난 2년 동안 정말 쉬지 않고 일을 했어요."
 
▲ 책 만들 시간이 확보되는 일자리를 찾아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승희 씨가 생수 배달을 하고 있다.
이 씨의 아르바이트 경력은 다양하다. 주차관리원, 카드 택배 배달원, 오토바이 택배, 한의원 업무 보조원, 해운창고 하역직, 골프 스크린 업소 종업원 등 할 수 있는 분야는 다 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조건은 아주 간단하다. 책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책에 투자하는 시간을 손해 봐야 한다면 하지 않았다. 책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 아르바이트는 그 뒤의 일이다. 한의원에서 일을 할 때에는 수입이 괜찮았지만, 책에 집중할 시간이 모자랐다. 그래서 그 일을 그만 두고 다른 일자리를 찾았다.
 
"지금은 어떤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책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거리낌이 없지만, 처음에는 저도 좀 부끄러움을 탔지요. 오토바이택배 일을 할 때에는 한여름이었는데도 눈만 내놓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이 씨는 지금 낮에는 여행사 사무실 업무 보조와 생수 배달을 하고, 밤에는 모텔 방 청소를 하면서 책을 만들고 있다.
 
이 씨는 대구와 부산에서 1인출판사를 경영하면서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그쳤다. 서울의 어학교재 전문출판사 직원 경력을 가진 그가 보았을 때, 지역의 출판 인프라는 원하는 수준의 책을 만들어내기에는 미흡했다. 디자인부터 제본과 배본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는 출판과정에서 한계를 겪었고, 다 만든 책을 폐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급기야 이 씨는 맥컴퓨터 앞에 앉아 편집디자인을 직접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후회했다. "대학 다닐 때, 이 과정을 왜 좀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하고 말이다. 편집 디자인 관련 과목을 배울 때 확실하게 해두었더라면 훨씬 편했겠지만, 이런 일쯤은 이 씨에게 넘어야 할 많은 과정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1인출판을 포기하지 않는 이 씨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현재 어학교재의 텍스트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는 예정희 씨. 예 씨는 어학학원 원장이며, 부산지역 대학에 출강도 하고 있는 영어전문가로서 이 씨의 출판기획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대구 태성문고 김정식 사장은 서점 배본과 판매에 관한 조언을 해주는 고마운 친구이다.
 
삶의 모든 과정이 '책'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이승희 씨도 가장이다. 살림을 꾸려가는 부인 김민혜(33) 씨는 '현재의 생활안정'보다 '미래의 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편을 말없이 내조한다. "많이 미안하지요. 고맙고 착한 사람입니다"라는 이 씨의 말로만은 모자랄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인 한음, 2학년 기성, 4살 경민이까지 아들 셋도 책을 좋아한다. 첫째 한음이가 특히. 아빠를 닮아서 책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씨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집에 별다른 놀이기구가 없고 온통 책뿐이거든요. 책 말고는 놀잇감이 없으니까 자연히 책하고 가까워졌는지도 모르죠"라고 말한다.
 
온통 책에만 집중해 있느라 아이들 하고 자주 놀아주지도 못한다. 그러나 첫째와 둘째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는 일만큼은 꼭 지키고 있다. "둘째한테는 책 만드는 일을 가르치고 싶어요"라는 이 씨는 "어쩐지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며 웃는다. 부자가 대를 잇는 출판사가 나올 모양이다.
 
이 씨는 현재 어학교재를 만들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꼭 만들어보고 싶은 책을 출간하겠다는 목표가 따로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처럼 한국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 이 씨의 진짜 꿈이다. 생수를 배달하면서 책을 만드는 이승희 씨에게 물과 책에 대한 느낌을 물었다. "물은", 잠깐 호흡을 고르던 이 씨가 말했다. "물은, '굉장히 무겁다!'에요. 생수 한 통이 18.9ℓ에요. 18.9㎏이죠. 그런데, 실제로 들 때는 30㎏쯤 되는 거 같아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물은 굉장히 무겁습니다." 그렇다면 책은 무엇일까. 이 씨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책은 제 인생입니다."
 
생각해보면 물과 책은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물은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으로, 어쩌면 생명 그 자체일 것이다. 책은 유한한 인간의 삶에서 태어나는 기록물이지만, 무한한 생명을 가지고 오래도록 이어진다. 그래서 물도, 책도 똑같이 무겁고 중요하다.
 
사람들의 목마름을 적셔주는 물을 배달하면서, 사람들의 영혼을 채워줄 책이라는 꿈을 키워가는 이희승 씨. 언젠가 한국출판문화에서 인정받는 책을 만들 그날까지, 이 씨의 양 어깨에 '물과 책'이라는 두 개의 '생명'이 함께 할 것이다.

이희승 씨의 1인 출판사 '틱택토'와 책

틱택토 출판사 미국의 어린아이들이 즐겨 하는 게임 중에 가로 또는 세로로 같은 숫자를 순차적으로 배열하면 이기는 빙고게임이 있다. 반복체계를 토대로 게임처럼 영어를 재미있게 공부하자는 의도로 출판사명을 '틱택토'로 지었다.
출판한 어학교재의 구성 문장을 인식하기 위한 방법론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한 개의 문장을 하루 동안 지속적인 반복을 토대로 인식을 시키는 것보다는, 주기적으로 그 문장을 반복한다면 어느 시점에 그 문장은 훨씬 더 자연스럽게 인식된다는 전제하에 텍스트를 구성했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기억의 장치를 뼈대로 삼았다는데 다른 책과 차별성을 둔다. 틱택토 GRAMMAR 1권이 끝나면, 2권에서 1권의 중요 문장들을 다시 반복되는 형식이다.
책의 특징 틱택토 GRAMMAR는 GRAMMAR책이다. 그러나 문법을 위한 문법 교재는 결코 아니며, 문장을 보고 직관적으로 어법이 틀리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교재이다. 영작 속에 어떤 문법적 구조가 개입되어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긴 문법적 설명에만 치중하는 것을 과감히 줄였다. 핵심적인 문법 설명과 실질적인 문장을 토대로 문법의 쓰임을 이해하도록 처리했다. 책 관련 문의=010-4640-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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