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전반 전국서 생산 활발
상동면 가마터서 요업활동 추정

 

분청사기(粉靑沙器)는 형태와 문양이 자유로워 가장 한국적인 미(美)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겉보기엔 투박하지만 표현 방식에 구애를 받지 않아 정돈되지 않은 듯 수더분한 매력의 자기이다.

분청사기는 조선 초기의 도자기로, 14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중엽 사이까지 약 200년간 만들어진 도자기이다. 15세기 전반인 세종의 재위 시기에는 다양한 기법의 분청사기가 발전해 전국에서 생산됐다. 분청사기란 이름은 1940년경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백토로 분장해 회청색을 띠는 도자의 특징을 근거로 분청회청사기라고 이름을 붙인 데서 유래했다.

분청사기는 기법에 따라 크게 일곱 가지로 나뉜다. 무늬를 음각으로 새긴 뒤 그 안에 백토 혹은 자토를 넣어 장식하는 상감기법, 도장을 이용해 장식하는 인화기법, 문양을 새긴 후 바탕의 흰 흙을 긁어낸 박지기법,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한 조화기법, 철사안료를 사용한 철화기법, 백토 물에 덤벙 담궈서 분장하는 덤벙기법 등이다.

철기시대부터 꽃을 피워 온 김해지역의 도자 문화는 김해토기에서 시작해 가야토기로 이어지며 신라시대~통일신라시대를 거쳐 전통을 계승해왔다. 조선시대 때의 분청사기는 그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게 된다.

조선전기에 편찬된 여러 역사서에도 김해 지역의 도자문화 자료들이 남아 있다. '경상도지리지' 김해도호부에는 김해의 토산공물이 자기라고 기록돼 있다. '세종실록'에는 도자기를 제작하던 도기소를 기록하고 있어 김해지역의 활발했던 요업활동을 짐작하게 한다.

김해 상동면 대감리 분청사기 가마에는 김해(金海), 물품 조달·관리하던 관청인 장흥고(長興庫) 등이 새겨진 분청사기가 출토돼 이곳에서 공납용 자기가 생산됐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수습된 다수의 백자편은 인화 분청사기의 전성기가 개시되는 1430년대를 시작으로 백자 제작이 본격화되는 15~16세기까지 이곳의 가마 운영과 제작품의 변화 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그 외에 김해읍성, 김해 구산동, 김해 가야의 숲 등지에서도 분청사기가 출토됐다.

1974년 일본인 스미즈 씨가 풍토가 적합한 김해 장유 지역을 선택해 가락요를 운영한 것이 공방의 출현을 알린 시초라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진례에 도예인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공방 수는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공방 대부분은 분청사기와 생활도자기를 제작하고 있다.

1996년에 처음 개최된 김해도자기축제는 2003년 제8회 축제부터 김해분청도자기축제로 명칭이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김해뉴스 /배미진 기자 b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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