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권 시인

깊어진다. 뜨겁던 그 여름이 막차를 타고 떠난 듯이 휑하다. 가락의 온 들판이 비워지고 곳간이 채워지면 부농이던 아니던 간에 마음은 풍요로워 진다. 들판으로 나가면 추수하고 남은 지푸라기 태우는 냄새는 아득한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 이때쯤이면 오래 전, 시골의 풍경이 아련하게 겹쳐진다. 추수가 늦어지는 저녁이면 밥상에 둘러앉아 온 가족이 먹는 밥맛은 잊을 수가 없다. 구수한 된장국에 보리밥을 쓱싹 비벼 먹으면 장군감이라는 아버지 말씀에 숟가락에 더욱 힘이 가기도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집도 참 가난했나 보다. 부모님은 내색은 안하셨지만 무척 힘들어 하셨나 보다. 아버지는 오랜 외지 생활을 접고 돌아와 하시는 농사일이 몸에 배지 않으셨는지 힘들어 하셨다. 그러다보니 나는 어머님을 도와서 지게도 지고 많은 농사일을 거든 기억이 생생하다.
 
부지깽이도 일어나 춤춘다는 바쁜 가을이면, 들판에서 자주 밥을 먹고는 하였다. 어머니가 내오시는 참은 별미 중에 별미였다. 간식거리가 따로 없는 시골에서 땀 흘리고 먹는 참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반찬은 별로 없지만 농사지은 밭에서 배추와 고추를 날로 씻어 된장에 찍어 먹는 게 전부였다. 배고픈 어린 시절 누구나 겪어왔을 시골 풍경이지만, 당신을 생각하는 사이 창밖에는 가난이 밀고 오는 어둠이 기억의 여백을 메우고 있다. 그러나 영원할 거 같은 시간도 순식간에 흘러가 버리고 까마득한 기억을 떠올리는 나도 이제 그 아버지의 나이를 지나고 있다.
 
가난은 떨쳐 버리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가난의 제단은 스스로 쌓지 않아도 쌓아지는 제단이었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가난한 집에 손님이 왔다. 쌀이 떨어진 그 집에서 옆집에서 쌀을 꾸어다 정성껏 차려 내었다고 한다. 어린 아이가 손님에게 내준 쌀밥을 보고 어머니께 졸랐다. 어머니는 조금 기다려 보라며 아이를 다독였다. 손님이 먹다 남기면 아이에게 줄 심산이었다. 조금 있다가 아이는 큰 소리로 울며 나왔다. 어머니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더니 "손님이 밥에 물 말아 버렸단 말이야" 참 웃지도 울지도 못할 옛날이야기이다.
 
대식구가 함께 밥을 먹다보면 찬이 모자랄 때도 많이 있었다. 편식이 심할 때였으니 입맛에 맞는 반찬은 항상 모자라기 일쑤였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이 집도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데 반찬이 바닥을 보였다. 마지막 남은 반찬이 없어지고 빈 접시에 새우 한 마리가 남았다. 아버지는 바라보는 아이에게 "얘야 남은 새우 한 마리는 네가 먹으라" 하고 말했다. 접시에 담겨져 있던 새우는 청화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순종하며 살아간 우리네 가난한 모습에서 쓸쓸함에 위트를 느낀다.
 
아들이 제대하고 복학하면서 자취하는 곳을 찾아갔다. 반찬이랑 먹을 것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들고 갔지만 아들이 밖에 나가서 밥을 먹자고 하였다. 아들 친구까지 불러서 근처 식당에서 이것저것 잔뜩 시켜서 먹었다. 결국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참으로 풍요로운 가을 밥상이 되었지만 쓸쓸하고 찹찹한 마음이었다.
 
가을에 풍요로운 마음이 드는 것은 먹을 것이 많아서 일까? 얼마 전 회사 동료의 초대로 농장에 간적이 있다. 소일거리로 키우던 닭까지 잡아서 아는 지인들과 맛나게 먹고 왔다. 아무리 이 가을이 풍요롭다 하지만 남을 불러서 키우던 닭까지 잡아 주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자연인답게 마음이 열린 회사 동료에게 진정 고마움을 느꼈다. 축복 받을 가을이었다.
 
이제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 모두 음악처럼 굴러가는 낙엽과, 마술처럼 떨어지는 바람 소리에 몸을 맡겨볼 일이다. 누가 부르지 않아도 그냥 달려가 보는 것이다. 가난도, 어머니도 없는 들판으로 가서 이번 생이 지나 가서 필요한 사람들과 긴 기다림의 시간을 함께 해 보자는 것이다.
 
이 가을에는 어느 누구와 사랑을 나누어도 배고프지 않으리. 시간이 마냥 흘러도 아깝지 않으리. 배고픔의 그림자가 떨어진 저 논바닥에 그리운 이의 얼굴을 그려놓고 그 얼굴을 쓰다듬어 보리라.  버리고 가는 것에 버리지 못한 정이 흐른다.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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