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변한다. 그리고 변화는 꼬리를 문다. 김해가 달라지면 김해의 마을도 달라진다.  20여년 전 장유면 대청리(계동마을)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당시 계동마을은 몇몇 집이 비탈산(추월산) 아래 자리를 잡고 있고 논농사 밭농사 지으며 오순도순 살던 곳이었다. 그러다 택지개발이 시작되면서 마을은 급격히 변해갔다. 비탈산은 평지가 되다시피 했고 도로가 생겼으며 건물이 늘어갔다. 몇 해 지나자 옛 계동마을의 모습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마을 입구였던 자리에 들어선 공원과 공원 안 우뚝 서 있는 마을 표지석만이 옛 계동마을을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 계동마을의 달라진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주진록 이장. 계동마을의 옛 모습은 그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비탈산 아래 60가구 옹기종기 모여 살던 그 시절
농사 지으며 자식 키우던 정겹던 마을이 개발되면서 보상 문제 대변하다 이장이 됐지요

22년째 이장직을 맡고 있는 주진록(65) 이장은 이곳 대청리가 고향이다. 젊은 시절 6년간 외항선을 탔던 것을 제외하고는 늘 이곳에서 살았다. 지금은 도시가 됐지만 '정겹던 시절'은 그의 마음속에 아직 살아 있다. 비탈산 아래 6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20년 전의 기억 말이다.
 
그해(1980년 대 말) 논농사 밭농사에 구슬땀 흘리며 자식 키우던 마을에 거대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마을 일대가 택지개발지역이 되면서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했던 것. 그 무렵 보상이 이뤄졌고 계동마을 사람들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인물로 그가 발탁됐다. 그가 처음 이장이 된 사연이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살아갈 걱정에 보상금을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했어. 보상일에 관여하면서 마을 일을 하게 됐고 (택지개발 보상이) 몇 년에 걸쳐 반복되면서 오래 이장을 할 수 있었어. 지금은 하려는 이가 없어서 이 일을 하고 있지만."

고향은 도시로 변하고 마을은 외지인들로 들어차
숟가락 몇개인지도 알던 이웃 하나둘 마을을 등지고 …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죠 그 옛날 계동마을로

택지개발은 계동마을의 외형뿐 아니라 마을사람들의 삶까지 모두 바꿔 놓았다. 어떤 이는 마을을 떠났다. 그 중 일부는 보상금으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갔다. 보상금을 자식에게 줬다가 빈털터리가 된 이들도 있었고, 타지를 전전하다 고생만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고향에서 생을 마감한 이도 있었다. 농사짓던 땅은 도시로 변했고, 마을은 외지인들로 채워졌다.
 
그런 가운데 주 이장은 고향에 남았다. 그는 택지보상금으로 집 인근에 새집을 지었다. 보통 택지개발이 이뤄지면 1여년 뒤 땅값이 뛴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그는 떠나는 마을사람들에게 '이주지(대체부지)'를 팔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마을 사람들이 이주지를 팔고 마을을 등졌다.
 
"보상문제로 마을 사람 간에도 불신이 생겼지.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는 이들이 있었고."
 
이장의 역할도 조금은 달라져야 했다. 택지개발 전엔 마을 민원이 대부분 이장에게 몰렸다. 그러다 보니 '어떤 집에 수저가 몇 개인지' 알 정도로 관계가 두터웠다. 하지만 외지인들이 늘며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민원이 발생하면 스스로 해결하는 경우가 늘었고 간섭받기 싫어하는 요즘 특성상 이웃에게 무관심하게 됐다.
 
▲ 마을 청년모임인 계동추월회가 택지개발 전 계동마을을 기리기 위해 세운 표지석.
"어쩌면 지금이 이장일 하기 더 수월해. 그전까지만 해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사는 집에 전기 이상이 있으면 이장이 나서서 고쳐줬고, 애들 출생신고까지 도맡아 했어. 지금은 거의 우편으로 통지가 가지만 민방위통지서처럼 이장이 직접 전달해야 하는 것도 있는데 전달하기가 쉽지 않아. 집에 없는 경우가 많아 몇 번을 가야 하고 본인인데도 '그런 사람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어. 그땐 참 난감하지."

주 이장은 새벽 5시면 눈을 뜬다. 일어나서 처음 하는 일은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것. 운동을 겸한 것이지만 40여분을 걸으면서 마을을 살피고 쓰레기 등 민원사항이 있는지 둘러본다.
 
"60평생을 장유에서 살았지만 막상 장유에 대해 잘 모르고 살아. 그만큼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지. 물론 경제적으로는 나아졌어. 집값도 올랐고 나름 여유도 생겼지. 하지만 그 옛날 계동마을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가고 싶어. 불가능한 얘기겠지."
 
그는 부인과의 사이에 3녀1남을 두었다. 연이어 세 딸을 낳은 뒤 마지막으로 아들을 얻었다. 큰 딸은 출가했고 나머지 두 딸은 직장에, 막내아들은 대학에 다닌다.
 
"항상 남에게 양보하고 마음을 폭넓게 가지라고 얘기하지. 내가 먼저 베풀어야 돌아오는 것도 있으니. 20년 넘게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마음 때문이 아닌가 싶어."
 
주 이장은 이장으로서 가장 잘한 일로 공동보상 받은 3천400만 원을 각자 분배하지 않고 마을공동의 명의로 예치한 것을 꼽았다. 그 이자수입으로 매년 두 번 마을잔치가 열리는데, 봄에는 경로잔치가 겨울에는 마을회의와 조촐한 잔치가 마련된다. 이밖에도 상수도가 없던 시절 마을에서 4㎞ 떨어진 폭포수에서 물을 끌어왔던 일, 마을 사람들의 수많은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일 등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주 이장은 얼마 전 친구 자녀의 결혼주례를 섰다. 종종 주례를 서는 그인데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 이들에게 "결혼 후 적어도 40~50년을 함께 사는데 살다가 돌아봤을 때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작 본인은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그렇게 살아 보라고 충고하는 게 도리인 것 같아 꼭 빼놓지 않는다고.
 
그가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무역선을 타던 시절 닥친 죽음의 위기를 넘긴 직후부터였다. 호주에서 철광석을 싣고 인도네시아로 향하던 그가 탄 무역선이 거대한 폭풍을 만났다. 배 앞의 파도는 거대한 산과도 같았다. 살아날 틈이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닫았다. 그 순간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죽으면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올까", "아직 아빠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갓 태어난 딸이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 부모님께 죄송하구나"….
 
하지만 그를 비롯한 동료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다행히 살아 남았다. 그리고 그는 곧장 배 타는 일을 그만뒀다.
 
"부산의 한 사찰에서 본 글귀가 마음에 와 닿더라고. '너의 과거를 알려고 하거든 지금 현재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봐라. 너의 미래를 알려고 하거든 지금 현재 네가 하고 있는 것을 봐라'는 글귀였어. 그런데 돌아볼수록 후회되는 일이 많아."
 
'22년째 이장님'이 마을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저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이다. 저마다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살기좋은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다.
 
인터뷰가 끝난 뒤 주 이장과 마을을 한 바퀴 둘러봤다. 달라진 모습이지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때문에 계동마을의 옛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이제 갓 터를 잡은 사람들에게 남은 숙제가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