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이 직면한 '붕괴' 위기
금융·상업·정치·사회·문화 등
신뢰 기반 둔 문화적 변화 추구



지구촌이 직면한 경제위기와 폭압적인 패권 정치, 자원 고갈, 기후 변화와 같은 문명 붕괴의 조짐 앞에서 인간이 온전한 정신과 인간성을 지키며 살아남는 방법은 없을까?
 
'붕괴의 다섯 단계'의 저자는 지구촌의 붕괴를 전제로 금융 위기에서 인간성 상실까지 우리 앞에 놓인 붕괴의 단계별 국면들과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해 얘기한다. 붕괴 이후에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위기를 돌파하는 새로운 삶의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붕괴다. 하지만 붕괴가 정말 일어날 것인지 그리고 언제 일어날 것인지를 논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붕괴가 어떤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가, 일단 시작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 그리고 거기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이다."
 
저자는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지속되는 가운데 타인을 눌러야 자신이 살 수 있다는 생존의 압박감이 야기하는 인간성 상실을 지적한다. 이와 함께 공감·친절·배려·환대·나눔과 같은 시민의식이 옅어지고 있는 현실도 안타까워 한다. 책은 변화와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처럼 개인의 생존만을 지상 최대 가치로 여기게 된 사회가 과연 지속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책의 구성은 붕괴의 과정을 금융 붕괴부터 상업·정치·사회·문화 붕괴까지 다섯 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책이 예측하는 금융 붕괴 단계의 특징은 금융 자산이 보장된다는 믿음이 사라지고 저축은 휴지조각이 되며, 자본 접근성이 막히는 양상을 띤다. 상업 붕괴 단계에서는 화폐는 가치절하를 겪거나 희소해지고 수입에서 소매업까지 이어지는 연쇄 고리가 끊어진다.
 
정치 붕괴는 기초 생필품을 살 수 없는 상태가 만연하고, 정부가 여러 가지 시도를 하지만 효과를 내지 못해 '정부가 돌보아 준다'는 믿음이 사라지는 단계다. 사회 붕괴 단계는 '이웃이 돌보아 준다'는 믿음이 사라진 상태로, 자선 기관이나 지역사회 기관들이 권력의 공백을 메우게 되지만 자원 부족이나 내부 갈등으로 실패한다. 마지막으로 문화 붕괴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가족이 해체되고, 희소한 자원을 놓고 개인들이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을 벌이는 단계다.
 
이 책은 단순히 붕괴의 여러 징후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산업문명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해부하는 현실세계 탐구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저자의 탐구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금융·자본·상업·국가·사회·환경 등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저자는 지구촌 경제가 매일 기능할 수 있게 해주는 금융의 역할을 살펴보면 붕괴의 역학이 어떠한 것인지를 좀 더 깊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경제는 지구적 차원에서 작동하며 금융과 수입 무역으로 굴러가는 지구적 경제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금융에서 상업으로, 정치적 붕괴로 계단식 실패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자본이 국제적으로 이동하는 오늘날 전 세계적인 보편적 조세 체제는 존재하지 않기에 조세 부담은 각국의 시민들과 지역 중소기업에 맡겨진다고 책은 세계체제의 특성을 분석한다. 더구나 대규모 자본은 더 싼 노동력을 찾아 국경을 넘어 이동함으로써 수익을 얻고 슈퍼 리치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지역에 쌓아두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메카니즘에 따라 복지국가로서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전 세계에 걸쳐 국가안보 문제로 관심을 돌리는 정부가 늘어났으며, 결국 국가가 아니라 금융 자본주의 중심의 초국적 기업이 정치적 실체로 대두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저자는 현대 산업문명을 착취 구조로 유지되는 시스템으로 진단하면서 권력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돼 '규모의 경제'에 갇히게 되면 붕괴하는 것 말고는 탈출구가 없다고 단언한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붕괴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피해야 할 악몽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밀물이 들어왔다가 썰물이 나가는 것처럼 인간 역사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정상적인 한 부분"이라고 진단한다. 비록 붕괴라는 것을 은폐하려는 경향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만, 이는 우리의 적응을 가로막을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런 이유로 붕괴의 각 단계마다 몰인격적이고 상업적인 관계를 버리고 신뢰에 기반을 둔 문화적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그 구체적 모습은 작은 단위에서 인격적인 상호작용을 맺으면서 위계적 작용 없이 자율과 자치, 협동으로 유지되는 아나키즘에 가까운 형태로 보인다.
 
독자들이 저자의 이 같은 주장에 동의할 것인지, 동의한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처럼 중앙집권화된 시스템에서 벗어나 자율적이고 평등한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데 동참할 것인지, 책은 우리의 판단과 결단을 요구한다.

부산일보 백태현 선임기자 hy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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