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순형 선임기자

"남의 곳간 털어서 지져 먹고 볶아 먹고 하나당, 두나당, 너거당, 우리당 패거리로 짝짜꿍 궁합 맞춰 똥 싸는 양반님들에게 똥침이나 찔러 줄까나…"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이 한창이던 시절. 민중문화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마당놀이, 고성오광대의 한 대목이다. 주인공 말뚝이가 기득권층이었던 양반을 조롱하는 대사를 걸쭉하게 늘어놓던 풍물패들은 당시 대학 축제뿐만 아니라 반정부 시위 대열에서도 맨앞줄을 차지했었다. 그런 대학 문화가 6월 항쟁으로 이어져서 "이 땅에 민주화를 앞당겼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어떻게 한낱 민속놀이에 불과한 마당놀이가 어떻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기폭제가 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소장은 저서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에서 명쾌한 답변을 내어놓는다.

무능과 부패로 얼룩진 후기 조선 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한 19세기 중반. 지방관청에서 근무하던, 아전들이 섣달그믐이나 단옷날에 관아마당에서 기득권층인 양반을 조롱하는 연희 무대를 만든 것이 탈춤을 추는 마당극이라고 했다.

요즘 말로 하면 공무원노조에 가입한 하급 공무원들이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이권 개입을 일삼는 토호 세력들을 고발하는 연극 무대를 마련한 셈이라고나 할까. 이처럼 잘못된 관행이 판을 치는 사회 현실을 고발하면서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들을 정면에서 비판하는 마당놀이 정신을 1980년대 대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대열에서 되살린 것이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그렇다면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되살렸던 마당놀이를 구체적인 현실에서 되살리는 노력이 이어지지 않았더라면 과연 우리나라의 앞날은 어떻게 되었을까. 비슷한 시기에 시민혁명을 일으키고도 부정부패가 만연한 극빈국가로 전락한 필리핀의 운명과 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라는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최근 정부와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무형문화재를 발굴하는 작업에 나서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가야 왕도 김해'에서 뿌리를 이어온 마당극, 김해오광대의 오늘은 과연 어떨까. 일제강점기에 이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김해오광대는 1984년, 류수현 당시 김해문화원장을 비롯해서 몇몇 뜻있는 시민들이 개인 호주머니를 털어서 되살린 민속 마당극이다. 그런 노력이 결실을 본, 2015년에 경상남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마당극이다.

이처럼 김해 시민들이 힘을 모아 되살린 김해오광대보존회가 아직도 차세대 김해오광대를 이끌어갈 후계자들이 연습할 공간조차 없는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무려 40여 명에 달하는 김해오광대보존회원들이 모여서 민속 문화에 대한 정보를 나눌 수 있는 장소는커녕 북과 장구 꽹과리 등 기초적인 기능을 익힐 수 있는 공간조차 없어 매주 목요일 7시, 김해문화회관 강당을 빌려서 두 시간씩 연습하는 것이 전부라고 했다. 그나마 문화회관에 행사가 있는 날엔 아예 연습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김해오광대의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과연 그러고도 김해가 '문화의 도시'를 자처할 수 있을까.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가야사 복원을 강조했다. 가야사 복원 작업은 중앙 정부 차원에서 이뤄지는 예산 지원 정책만으로 이뤄질 사안이 아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힘으로 되살린 김해오광대 처럼 기층 서민문화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밑바닥에서부터 출발해야 진정한 가야사 복원에 첫발을 디딜 수 있을 것이다. 김해시청 당국이 김해오광대 전수관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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