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그렇게 될 수 없던’ 개념 주목
“변화 향한 정념, 언제든 볼 수 있게”
 미래 한반도·국외 정세 시사점 커



최근 한반도 정세는 대 반전 중이다.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비핵화 로드맵, 북·미대화 같은 이슈들은 '동아시아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획기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여준다.
 
지금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같은 냉전 패러다임의 전환은 지나간 시간 속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을까. 이 책은 전후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는 양극 구조의 국제 질서를 거스르며 길 없는 곳에 길을 내고자 분투했던 일군의 사람들과 그러한 시도들을 다시 불러 모은 일종의 '계보 만들기' 컬렉션이다.
 
이 책의 1부는 해방기에 '중간파' 혹은 남북협상파라 불렸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남한만의 총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이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되었을 때, 이른바 중간파들은 미국과 소련 양극 모두에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향후 진로를 모색한 이들이다.
 
특히 소설가 염상섭이 이 계보의 첫 번째 순서에 놓인다. 그는 서울 중산층의 삶을 그린 소설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해방기에는 남북협상파를 적극 지지했던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미국을 적으로 돌리지도 않았고, 미국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도 역시 거부했던 그는 당국의 검열 속에서도 자신을 닮은 인물들을 소설 속에 그려냈다.
 
이 책은 염상섭으로부터 시작해 정치인 여운형과 조봉암, 1960년대의 작가 최인훈과 이호철, 동양사학자 김준엽과 민두기, 그리고 1970년대의 장준하·함석헌·리영희와 같은 인물들을 바로 지금, 여기로 불러낸다.
 
사람들만이 아니다.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 1964년의 한·일국교정상화 반대운동, 1955년의 반둥회의와 같은 역사적 사건들도 '결을 거스르는 움직임'의 계보 속으로 소환된다. 미국과 소련 양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는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의 모임이었던 반둥회의는 '제3세계'라는 대안적 정치 플랫폼을 구상하고 실천하려 한 정치운동의 모태였다.
 
책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시도들이 각자의 한계를 안은 채 성공적으로 안착하지 못하고 결국 좌절하는 과정도 같은 비중으로 중요하게 다룬다. 어느 지점에서 빛났고 어느 지점에서 허망하게 무너져내렸는지 음미하고 복기함으로써 역사적 균형감각을 잃지 않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이 책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었던' 개념들에 주목한다. 냉전을 둘러싼 국내외 정세에 따라 급격히 주변화되거나 금기시 됐던 개념들이다. 해방기의 '중간파'(1장), '농민'(2장), 한국전쟁기의 '포로'(3장), 1960년대의 '동양/아시아'(4장, 6장) 및 '북한'(5장), '민족주의'(7장), '식민지'(8장), 1970년대 초반의 '평화'(9장)와 같은 개념들이 그것이다.
 
예컨대 1960년대 한·일국교 정상화가 추진되던 시기의 소설가 최인훈에게 "'회색인'은 식민의 종식 상태 자체를 의심하는 텍스트였다. 달리 말해, 우리가 언제 식민지인이 아닌 적이 있었던가, 라는 급진적인 회의로 자신의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경우"였다.(326쪽) 
 
이처럼 책에서 불러 모은 탈냉전적 상상의 계보들은 그저 먼지 묻은 아카이브 속에서 잠자는 아무래도 좋을 과거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화해와 평화가 오늘의 한반도에서 불어오는 시대정신이라면, 책에서 소환한 이런 인물과 목록들은 과거와 현재를 가로질러 미래로 갈수록 더 많이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냉전과 냉전의 '결을 거스르는 움직임'이 이 책의 주제라면, 결국 이 책은 냉전과 그로 인해 한반도에 형성된 분단이라는 뒤틀린 질서에 어떻게든 출구를 내보려 했던 사람들, 혹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 질서의 괴물 같은 폭력성을 증명했던 그런 사람들을 기억하려는 시도다." 이 책을 통해 그 '결을 거스르는 움직임'을 추동해낸 생각의 차이들, 누군가는 품었을 변화를 향한 정념들을, 지금 바로 여기에 우리가 언제든 꺼내어 볼 수 있도록 잘 보이게 놓아두려 한다는 것이다. 책은 1부 '개념의 분단, 적대의 기원', 2부 '냉전이 만든 지식, 냉전을 넘어서는 지식', 3부 '혁명의 정념과 데탕트'로 구성돼 있다.
 
부산일보 백태현 선임기자 hy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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