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병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진영 시가지 전경과 멀리 보이는 영남알프스 산세가 장관이다.사진=최산·여행전문가 tourstylist@paran.com

김해시 진영읍으로 접어들자 산들이 온통 선홍빛 붉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도 그럴 것이 11월 중순의 진영은 단감 수확의 막바지 힘을 쏟을 때이다. 이때의 단감나무 단풍은 잘 익은 단감보다 더 아름다운 붉은 빛을 띤다. 국내 최초 단감나무의 시배지인 진영. 그래서 비탈마다 단감나무 밭인 진영의 산들은 불타오르듯 온 산이 붉디붉은 것이다. 이 번 산행은 진영을 수호하고 있는 주산(主山) 금병산(金屛山 271m)을 오른다. 진영읍 서구 2동 마을 골목길을 들머리로 해서 금산사~체육시설 갈림길~정상~서구 2동 마을로 다시 내려오는 원점회귀코스다.

대흥초등학교에서 '거광 한빛 빌라트'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진영산복로' 삼거리의 보도 난간 안으로 마을 골목길이 보인다. 그 골목을 따라 길을 오른다. 오래된 마을이 스스럼없이 길손에게 골목을 내어주니 참 고마운 일이다.
 
진영이라 그런지 집집마다 단감나무 한 그루씩 키워내고 있어 담장 위로 빨간 감들이 넉넉하게 달렸다. 어느 집 호랑가시나무에는 꽃이 만발해, 달콤한 내음이 온 골목에 진동을 한다. 그 향기로움이 여인의 지분냄새 같이 아릿하다.
 
시골마을이라 무너진 담을 시멘트 기와로 아무렇게나 쌓은 집도 있고, 스러져 가는 흙벽을 자연 그대로 둔 집도 보인다. 담 너머 메주도 걸어놓고 빨간 고추도 한창 말리고 있다.
 
오르는 길 쪽으로 한옥 한 채가 폐가로 남아 있다. 흙벽이 무너지고 군데군데 서까래가 떨어져 나갔다. 마당에는 온갖 잡초가 우거져 황량하다. 그래도 몇 백 년을 간다는 돌담은 견고해 빈집으로의 출입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대청마루의 책장에는 아직도 백과사전, 전집류 등이 꽂혀 있고 큰 항아리, 돌절구 등은 마당을 지키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떠난 사람들의 인적은 어디에도 없다.
 

▲ 등산로 초입 마을에 있는 마을우물, 공동빨래터.

골목 따라 복개된 지하도랑에는 산물이 졸졸 흐르고, 그 위로 공동 빨래터가 아직 남아 있다. 가로 70㎝, 세로 40㎝정도의 직사각형 관정 옆에 빨랫돌이 놓여 있는데, 관정에서 물을 길어 빨래를 하도록 만들었다. 관정 속을 들여다본다. 맑은 물이 고여 있고 물가로 솔이끼와 민들레 몇몇 자라고 있다.
 
빨래터를 지나자 어느 집 담과 이어서 들어낸 창고건물이 보인다. 그 모양새가 특이해 함석문을 열어 보니 자그마한 마을우물이다. 깊지도 않고 바닥은 콘크리트로 마무리 되었지만, 물도 맑고 두레박도 있는 영락없는 우물이다. 마을우물이 사라져 가고 있는 요즘 이렇게 특이한 우물을 만나게 돼 참으로 반가운 마음이다.
 
마을이 끝나고 산 초입에 들자 곧바로 단감나무 밭이 보인다. 양쪽 골짜기 비탈 전체가 붉디붉게 단풍 든 감나무 밭으로 뒤덮였다. 감나무 사이로 몇몇 아주머니들이 발갛게 잘 익은 단감을 수확하느라 손놀림이 분주하다.
 
금병산은 전국적으로도 단감 재배에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산줄기가 병풍처럼 단감 밭을 감싸고 있어 해풍과 태풍 피해를 막아주고, 연평균 기온이 섭씨 13도를 유지하면서도 일조량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 금병산뿐만 아니라 진영 일대 산들은 단감 시배지답게 늦가을이면 온산이 붉은 단감 물결로 뒤덮인다.

단감나무 아래에는 토종닭들이 하릴없이 '꼬꼬댁 꼬꼬댁'거리며 부산하게 돌아다닌다. 길가 밭뙈기에는 배추, 무 등속이 시푸르게 자라고 있고, 그 옆 돌감나무 하나 탱자만한 감들을 조랑조랑 매달고 있다. 한 입 따서 맛을 본다. 잠시 달콤하더니만 곧이어 온 입이 다 떫다. '퉤퉤' 역시 돌감은 돌감이다.
 
조금 더 산으로 들자 곧바로 체육시설. 주위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단풍이 들었다. 그 뒤로 금산사가 보인다. 금산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슬슬 산행 길로 접어든다. 이정표에는 정상까지 1.2㎞라고 안내한다. 시작부터 조망이 뛰어나다. 진영읍 시가지가 얼추 다 열린다. 그 뒤로 진영벌판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곧이어 나무계단이 나오고 금산사에서 가꾼 듯 길 주위로 노란 소국과 붉은 샐비어가 색색대비로 사람 눈을 즐겁게 한다. 모과향이 살짝 나기에 고개 들어 보니 모과나무에 모과가 무거운 제 몸을 기대고 있다.
 
본격적인 산길. 참나무 낙엽들이 오르는 길을 죄다 덮고 있다. '바스락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청량하다. 가끔 밤송이도 뒹굴고 낙엽 떨어지는 소리는 크게 들린다. 계단길과 산길이 서로 마주하며 만났다가 헤어졌다 한다. 길게 굽이치는 길 따라 걷다 보니 길가로 '참취'가 무리지어 피어있다. 하트모양의 부드러운 이파리를 만져본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일시에 제 몸 만지는 손길을 느끼는 듯하다.
 
다시 만나는 체육시설. 이제부터 능선길이 시작된다. 올라 왔던 길을 내려다 보니 골 양쪽 전체가 붉은 단풍으로 자지러진다. 이정표 상으로 정상까지 0.8㎞.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이어진 계단길이 참 예쁘게 나 있다. 한참을 그 계단을 따라 오른다. 새소리만 들릴 뿐 고즈넉한 산행이다. 한참을 길가 양옆으로 줄지어 서 있는 소나무길이 계속된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능선길이다.
 
능선 오른쪽으로는 야산 전체가 감나무 밭이다. 잘 익은 감들이 빨간 등불을 켜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붉은 점을 꼭꼭 찍어 그린 점묘화를 보는 듯, 그 작은 등불에 길손의 마음마저 출렁인다. 그 사이로 갈지자 길들이 선명하게 펼쳐진다.
 
계속 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탱자나무 울타리 길을 걷고 있다. 탱자나무 사이로 참새 떼가 기척에 놀라 '파다닥' 날아오르며, 놀랬다는 듯 왁자하게 재잘거린다. 그 아래로 민들레 하나 아직 홀씨를 달고 얕은 바람에 살랑댄다. 때가 되면 모두 흩트려 보낼 삶이기에 하얗게 제 깃털 다듬느라 분주하다.
 
오르막이 가팔라진다. 낙엽들이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다. 마치 낙엽카펫을 깔아놓은 것 같다. 탱자나무에 떨어진 낙엽들은 탱자가시에 찔려 생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가파른 된비알을 넘어서니 큰 돌탑 하나 서 있다. 돌탑 사이 작은 빗돌에는 '六二五時 도치카터'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다시 능선이 시작되고 곧이어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헬기장이다. 숲에 쌓인 길은 계속 이어지고 직박구리 소리는 따라오면서 자지러진다. 멀리 크고 작은 돌탑무더기가 보인다. 정상 초입이다. 자세히 보니 정상부에 있는 돌탑만 거의 서른여 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무슨 발원이 그리 깊고 많아 이렇듯 많은 돌탑들을 정성스레 쌓아올렸는지 모를 일이다.
 
'金屛山 271m' 정상석에 선다. 바로 옆에는 어느 상이용사가 세운 '탕건산'이라고 새긴 작은 표지석이 한개 더 서 있다. 한때 '탕건산'으로도 불렸던 것 같다. 주위를 조망한다. 진영 시가지 쪽이 시원하다.
 
멀리 영남알프스의 호쾌한 산세가 하늘을 받치고 있고, 그 밑으로 낙동강 세 지류가 합수하는 지점이 보인다. 진영 뒤를 한림의 마을들이 둘러서 있고 봉화산도 어렴풋하게 보인다. 진영읍 시가지와 들판도 환하게 다가온다. 금병산과 연이은 산줄기는 응봉산, 태승산으로 하여 비음산, 용지봉으로 이어진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마루금이 웅장하다.
 
▲ 금병산 정상의 금병정

금병산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금병정(金屛亭)에 든다. 남해고속도로로 차들이 바쁘게 지나친다. 바로 앞 응봉산은 만추의 옷을 갈아입고 서 있다. 잘 자란 소나무 두어 그루 산을 가리고 섰다. 금병정 내부에 걸려 있는 '금병정기(金屛亭記)'를 읽어본다. '비단으로 만든 병풍처럼 아름다운 산이라 금병산이요, 진영의 수호산'이라 기록하고 있다. 편액 아래에는 '錦屛山, 儉兵山으로도 불리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그만큼 사연이 많다는 뜻이리라.
 
하산하는 길. 내려가는 오솔길이 더없이 그윽하다. 낙엽 밟는 소리가 오르는 길과 달리 더 바스락거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 편안하고 유유자적한 산이다. 그러나 금병산은 모든 것을 다 보여주면서도 그 속내는 감추고 있는 산이다.
 
마을 뒷산이면서도 알고 보면 진영의 주산이자 수호산이고, 단감나무의 시배지로서 우리나라의 단감 주생산지이지만, 그 이면에는 수탈의 역사와 해방공간의 슬픈 상처를 떠안고 있는 산인 것이다. 그래서 금병산은 그 질곡의 세월을 거쳤기에 다사롭고 부드럽다. 그 산이 품고 있는 마을 아이들의 선량한 눈인사가 이를 증명하는 듯하다.


Tip. 금병산 돌탑 속 빗돌에는 무슨 사연이

금병산 정상을 앞두고 된비알 끝 지점에 3m정도의 큰 돌탑이 하나 버티고 있다. 노둣돌만한 크기의 돌들로 묵직하게 쌓고, 그 돌탑 전체를 굵은 철사로 얽어 놓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 견고함은 눈으로 봐도 수천 년을 견딜 것 같다.
 
그 돌탑 아래쪽 작은 빗돌 두 개가 돌 틈 사이에 끼여 있다. '六二五時 도치카터'와 '愛鄕'을 새긴 빗돌들이다. 말인즉 '한국전쟁 당시 참호(토치카)가 있던 자리'란 뜻이겠다. 그런데 이 빗돌에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한국전쟁 당시 남북 간 직접적인 전투가 없었던 진영 뒷산에 왜 '토치카 터'가 있으며, '愛鄕(애향)'이라는 빗돌은 어떤 의미로 함께 있는 것일까?
 
진영은 해방 공간에서 좌우익의 극한 대립과 남로당 폭동으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이는 진영평야의 대부분을 7~8명의 주지들이 독점한 상황에서 수많은 소작인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급기야 좌우익의 폭동으로 비화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수의 양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미루어 생각해 본다면 이곳에 한국전쟁 당시 토치카 터가 있었던 이유는, 그 시절 좌우익의 극한 충돌과정 속, 그 저항의 흔적들은 아니었을까? 진영 출신의 소설가 김원일의 장편소설 '노을'에서 보더라도, 진영 일대에서 일어난 좌우익의 생사를 건 전쟁은 '미친 세상을 살기 위해 절규하는 인간군상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 금병산 정상 부근에 있는 토치카 터. 6·25때 참호가 있던 자리이다.

누가 세웠는지 모를 이 무명의 돌탑에는, 그 시절 전쟁의 상흔을 '고향사랑(愛鄕)'으로 치유하자는 애틋한 뜻이 절절히 박혀있는 듯하다. 그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돌탑 옆으로 뻗고 있는 찔레덩굴이 길손의 가슴 한 곳을 아프게 찌르고 있다.

 






최원준 시인 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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