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 부원동 함흥냉면밀면전문점의 냉면. 함경도식을 따라 고구마 전분으로 면을 뽑고 특제 양념장에 비벼 먹다 물리면 국물을 넣어 물냉면으로도 먹을 수 있다.  사진/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내 주변에는 냉면광들이 많다. 그들의 특징은 오랜만에 만나서, 점심으로 뭘 먹을까 하면 즉시 "냉면이지, 먹을 게 뭐 있다고"라고 대답하거나(저녁에도 마찬가지다) 몇 년 만에 전화를 했어도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다정하게 "우리 OO냉면 먹으러 가야지"하는 식으로 말한다(죽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어떤 음식도 냉면처럼 열렬한 신도를 거느리고 있지 못하다. 비빔밥, 육개장, 찰떡 뒤에 '광'자를 붙였다 떼보면 냉면의 위대성을 쉽게 알 수 있다. -성석제 '소풍'

맞다. 냉면은 그런 음식이다. 자신의 기호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 굉장히 소극적인 한국인들조차 냉면에 대해서 만큼은 '신도' 혹은 '마니아'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많다. 숨은 고수들 또한 곳곳에 포진해 있어 함부로 아는 척 나섰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저마다의 확고한 '냉면관' 혹은 '냉면철학'을 가지고 있어 어느집이 최고라며 쉽게 꼽지도 못한다. 하고 많은 음식들 가운데 왜 하필 냉면에 대해 이처럼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보이는 걸까? 단순한, 아니 순결한 음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냉면은 면과 육수라는 아주 단순한 조합으로 완성된다. 그러나 단순하다는 것은 결과만 놓고 볼 때 그렇다. 면과 육수 제각각을 완성하는 데는 그 어떤 음식보다 많은 경험과 수고가 필요하다. 그렇게 따지자면 국수나 우동도 마찬가지 아니냐며 따질 수도 있다. 맞는 말씀이다. 냉면·국수·우동 모두 단순하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냉면은 차다. 뜨거움은 음식이 가진 어지간한 겉치레나 단점을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음식이 식으면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애초부터 차갑게 만들어진 냉면은 그래서 순결한 음식이다.
 
헌데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말한 '냉면'은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사골육수나 동치미국물에 말아먹는 '평양냉면'을 의미한다. 애호가들에게 있어 냉면은 곧 평양냉면이다. 이미 그것이 원형이기에 굳이 거추장스럽게 '평양'이라는 지명을 붙이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인으로부터 김해에 괜찮은 냉면집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김해에 냉면집이? 에이~ 설마' 싶었다. 어찌나 강력하게 추천하던지 일단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니다 다를까 평양냉면이 아닌 함흥냉면집이다. 냉면과 함흥냉면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으로 봐서, 그 지인은 '냉면광'이 아님에 분명했다.
 

▲ 갖은 고명과 뜨겁고 찬 두가지 육수가 함게 나와 입맛대로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두 음식의 구분이 중요한 까닭은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은 차가운 면요리라는 공통점 외에는 엄연히 다른 음식이기 때문이다. 우선 면을 보자. 평양냉면은 메밀가루로 만드는 데 반해 함흥냉면은 감자나 고구마전분으로 만든다. 형태 역시 맑고 담백한 육수에 면을 말아먹는 평양냉면과 달리 함흥냉면은 양념장에 비벼서 먹는다. 그래서 둘은 맛의 포인트도 다르다. 평양냉면은 면과 육수의 조화를, 함흥냉면은 면과 양념장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긴다.
 
게다가 평양냉면은 조선시대부터 유명세를 떨친 음식인 데 반해, 함흥냉면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평양냉면이 인기를 끌자 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개발된 음식이다. 지금도 북한에는 함흥냉면이라는 말 자체가 없다. 옛날 함경도는 산세가 험해 메밀농사조차 힘들었고 그나마 흔한 것이 감자였다. 또한 함경도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감자를 재배한 곳이기도 했다. 이 감자전분으로 만든 면을 함경도 사람들은 '농마국수'라 불렀다. 더불어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동해안과 접한 함경도는 수산업이 발달했다. 그래서 국수에 신선한 생선을 곁들여 먹었는데 이를 '회국수'라 했다. 따라서 감자전분으로 만든 면에 명태·가오리·가자미 등을 올려 양념장에 비벼먹는 함흥냉면은 함경도의 농마국수와 회국수의 합작인 셈이다.
 
이 함흥냉면은 부산과 인연이 깊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로 시작하는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랫말에 그 실마리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두만강 연안까지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전면 공세에 퇴각을 결정한다. 1950년 12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함흥시 남쪽에 있던 흥남항을 통해 전쟁 역사상 유래가 없는 해상 철수작전을 개시하는데 이것이 '흥남철수작전'이다. 이때 약 9만1천 명에 달하는 북한 주민 역시 미군 수송선을 타고 남으로 왔는데, 이들 피란민들이 내린 곳이 부산과 거제 등이다.
 
인구의 이동은 자연스레 문화전파를 수반한다. 특히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음식문화는 그 전파의 속도나 생명력이 길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했다지만, 법은 따를지언정 음식 만큼은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의 우암동과 당감동 등지에는 대규모 피란민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고향에서 먹던 농마국수와 회국수를 잊지 못했던 피란민들은 난리통 속에서도 그와 비슷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바로 밀면의 시작이다. 지금도 우암동과 당감동에는 유명한 밀면집이 더러 있다. 부산 지역에 대형 함흥냉면전문점은 보이지만 평양냉면전문점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것 또한 같은 이유다.
 
자 그럼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부원동에 있는 '함흥냉면밀면전문점'을 살펴 보기로 하자. 가게 내부로 들어서면 육수 주전자가 주렁주렁 달린 벽 위로 '50년 전통의 함흥냉면 밀면'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굳이 내력을 따지자면 50년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집의 윤호인(43) 대표가 장사를 시작한 것은 13년 남짓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이런거 좀 틀린다 해서 '쇠고랑' 차는 거 아니니 굳이 따지지 말기로 하자.
 
▲ 특제 양념장 '짠땅'. 사골육수와 갖은 채소, 한약재 등을 넣고 3일간 끓여 6개월 이상 숙성시킨다.
함흥냉면을 먹는 첫번째 순서는 육수맛을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쇠고기 사골을 우려낸 국물에 간장으로 간을 한 뽀얀 육수는 제법 담백하고 감칠맛이 난다. 뜨거운 육수와 차가운 냉면은 '부조화의 조화'를 이룰 뿐더러, 매운 양념으로 자극받은 입안을 순화시켜 주는 역할도 한다. 면발은 함흥냉면 특유의 질긴 성질을 가지면서도 목넘김이 의외로 부드럽다. 윤 대표에 따르면 고구마전분만 사용했다고 한다. 원래 함흥냉면은 감자전분으로 만들지만 언제부턴가 고구마전분이 대세로 자리잡았다. 고명으로는 달걀과 채썬 오이와 배가 올려져 있다. 암만 뒤적여 봐도 명태나 가자미 등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쇠고기 수육 몇 점이 보인다. 요즘 부산·경남 지역에서는 이런 집이 더러 있다. 현지화의 한 과정일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함흥냉면은 면과 양념장의 조화를 즐기는 음식이다. 그럼 점에서 봤을 때, 질긴 면발과 자극적인 양념장의 조화가 솔직히 기대 이상이다. 무엇보다 달지 않아서 좋다. 요즘 함흥냉면은 지나치게 단 경향이 있는데 '함흥냉면밀면전문점'은 단맛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 거북스럽지 않다. 게다가 매콤한 양념장에는 숙성에서 오는 깊은 맛이 있어 젓가락을 더욱 분주하게 한다. 덕분에 함흥냉면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우고 사리까지 추가로 시키고 말았다.
 
'함흥냉면밀면전문점'에서는 뜨거운 육수와 찬 육수 두 가지를 제공한다. 비빔면을 먹다가 물리면 찬 육수를 부어 물냉면을 만들어 드시라는 의도다. 부산에도 가끔 이런 냉면집이 있는데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이는 매우 상징적인 방식이다. 이것이 곧 함흥냉면에서 밀면으로의 변화 과정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전분을 구하기 어려우니 구호물자인 밀가루로 면을 만들었고, 먹고 살기도 바쁜 처지에 면 따로 육수를 따로 즐길 여유가 없었으니 합치자! 그래서 나온 것이 밀면이다. 따라서 이 함흥냉면 한그릇은 지난 50년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러니 '50년 전통'이라는 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 함흥냉면밀면전문점의 윤인호 대표가 주방 벽에 걸린 육수 주전자를 배경으로 냉면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함흥냉면을 먹고 윤호인 대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양념장에서 느꼈던 깊은 맛의 정체가 궁금했다. 양념장을 미리 만들어 두어 숙성을 시키냐 물었더니 아니란다. 채소가 많이 들어가는 양념장을 그렇게 오래두면 삭아버리거나 물기가 나와 상할 염려가 있단다. 그래서 매일매일 그날 쓸 양념장을 만든다 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맛이 나냐며 재차 물었더니, 한참 뜸을 들인 끝에 작은 접시에 거무티티한 액체를 담아왔다.
 
아주 짜긴 한데 양념장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숙성된 맛이 느껴졌다. 정체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짠땅'이라 부르는 조미료로, 왜 그런 명칭이 붙었는지는 윤 대표도 정확히 모른다고 했다. 사골육수에 갖은 채소와 계피·감초·미삼, 간장 등을 넣고 3일을 끓여낸 농축 육수를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육수를 6개월 이상 숙성시킨 것이라고 한다. 이 짠땅에 고춧가루, 설탕, 물엿, 양파, 파 등등을 넣으면 그대로 깊은 맛을 내는 양념장이 된다. 뿐만 아니라 찬 육수 역시 이 짠땅을 희석해서 만드다고 한다. 확인차 물을 부었더니 진짜로 찬 육수와 같은 맛이 났다. 음식맛은 장맛이라 했는데 짠땅맛을 보고나니 '함흥냉면밀면전문점' 음식의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원조 함흥냉면의 원형과 얼마나 비슷하냐를 떠나, 이 정도 공을 들이는 음식이라면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 받아 마땅하다.
 
냉면은 여름음식이라는 인식이 워낙 강하다 보니 '함흥냉면밀면전문점' 역시 요즘은 한산하다. 하지만 냉면은 겨울이 제철이다. 찬바람에 움츠려든 몸을 뜨거운 육수 한 모금으로 진정시킨 다음, 쨍한 맛의 냉면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어지간한 추위 따위야 대수롭지도 않다. 더군다나 도떼기 시장 같은 여름철 냉면집보다 요즘처럼 한가로운 편이 훨씬 낫다. 냉면은 원래 그렇게 먹는 음식이다.
 
▶메뉴:함흥냉면(6천원), 밀면(5천원), 갈비탕(6천원), 부원동과 서상동 주변은 배달도 가능하다.
▶위치:김해시 부원동 607-18
▶연락처:(055)322-2068

 





박상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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