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책은 나무색이 짙어지고 나무 냄새가 깊어진다. 내게도 책꽂이 한 쪽에 얌전히 꽂혀 있는 나무냄새 나는 책 한 권이 있다. 뽑아들지 않아도 펼쳐보지 않아도 바라보는 것만으로 넉넉한 그녀, 헬렌 니어링의 책이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는 세계적 지성인 스코트 니어링과 만난 저자의 자전적 에세이다. 26세에 스코트 니어링을 만난 저자가, 미국의 산업주의 체제와 그 문화의 야만성에 도전했던 스코트 니어링과 함께 나눈 53년 동안의 삶을 진솔하게 회고한 책이다.
 
누구에게나 20대는 혼돈과 갈등, 좌절, 시행착오, 고통 같은 명사들과 함께 하는 시기일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척 가난했지만, 꿈도 많았다. 그래서 부지런히 쫓아다녔고, 그만큼 힘들었다. 내 삶에서 뜨거운 의미를 가진 그 무엇을 결정해야만 하던 시절에 만난 책이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였다.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은 50년여년을 함께 살면서 서로를 키워주는 동반자이자, 친구, 남편과 아내로 행복했다. 그들은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라는 기준과 태도를 가지고 살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헬렌 니어링은 막연하게 생각했던 내 삶의 가치를 이미 동의한 상태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외로웠던 나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큰 위안을 주는 친구였다.
 
나는 덜 뾰족한 한 남자를 선택했다. 나는 평범한 보통에서 이상을 펼치고 싶었다. 따뜻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 포근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넉넉한 이웃이 되고 싶었다. 물처럼 바람처럼 고즈넉하지만 늘 차고 넘쳐나는 사람. 그냥 그런 편안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물론 그 삶의 조언자는 헬렌 니어링이었다.
 
어느덧, 내 나이 마흔을 넘겼다. 노련한 중년이 된 것이다. 삶의 허리에서 나는 앓았다. 죽어질 내 육신에게 한 줄 의미를 보태야 하는 시점이 온 것이다. 흔들릴 수 없는 '불혹'의 어미로서 내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찾아야 했다.
 
나는 '자연다움'을 선택했다. '땅'스럽고 '강'스럽고 '나무'스러운 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노력 중이다. 진통 중이다.
 
이 책의 얼굴인 '똥색'의 표지 가운데서 헬렌 니어링이 나를, 우리를 넉넉하게 안아주고 있다.
 
미국에만 헬렌 니어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김해, 우리 동네에도 헬렌 니어링은 있었다. 불모산자락에서 민들레 키우고 환을 빚는 예쁜 언니, 상동 묵방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예쁜 언니에게서도 나는 헬렌 니어링을 만날 수 있었다. 나도 예쁜 언니로 늙어 가고 싶다.


>> 양은희는
1971년 창녕에서 태어나 아름다운 우포늪을 보며 자랐다. 남편과 두 딸 솔이 빈이와 함께 행복을 만들어 가는 주부이며, 김해의 자연생태를 위해 활동 중이다. 현재 김해의 숲과 강, 김해사람들의 삶을 작고 소소하게 나누는 환경모임 '숲정이', 지역 어린이들의 생태놀이 동아리인 '흐르는 강따라 산따라'를 이끌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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