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분성산은 해발 382m의 낮은 산이다. 야트막한 나무계단을 오르다 체육공원을 지나고,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바위를 딛다보면 정상인 만장대에 이른다.

분성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김해 지역 대부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눈을 멀리 두면 낙동강과 서낙동강 줄기가 실개천 마냥 조그맣게 보인다. 이런 풍경을 '진경'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게 있으니, 바로 김해평야다.

원래 김해에는 평야가 없었다. 김해평야는 '金海(금바다)'라는 한자 이름이 시사하듯 저 옛날에는 평야가 아니라 바다였다. 그 증거 가운데 하나가 회현동 봉황대 아래에 자리잡은 김해패총전시관이다.
 

◆ 패총 - 바다였다는 확실한 물증

여기에서는 조개와 굴껍데기가 층층이 쌓여 있는 패총유적의 발굴단면을 볼 수 있다. 이것들은 가야인이 먹고 버린 것들로서, 김해가 바다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김해가 바다였다면 지금의 부산이나 인천 등과 마찬가지로 무역의 요충지는 아니었을까?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이영식 교수는 여기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

이 교수에 따르면, 가야는 선사시대부터 외국과 교류했다. 예를들어, 김해 수가리 패총에서 나온 유물 중 화살촉에 쓰인 '흑요석'은 화산이 있는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화산암이다. 한반도에도 백두산·한라산이라는 화산이 있긴 하지만, 김해에서는 일본 규슈 북부보다 거리상으로 더 멀다. 5천년 전의 사람들은 특정 장소가 눈에 보이는 경우에만 여행을 결심할 수 있었다.

◆ 흑요석 - 日큐슈와 교류한 흔적

분성산에 올랐을 때, 쓰시마는 눈에 들어오지만 제주도는 그렇지 않다. 이는 흑요석이 일본에서 수입됐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 자세히는 일본 규슈 사가현의 코시타케 화산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가 이처럼 일찍부터 무역과 교역이 활발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곳이 지닌 지리적 특성때문이었다.<삼국유사>를 보면, 김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할 당시 "김해의 땅은 여뀌잎같이 좁고 작지만…(후략)"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뀌잎은 바소꼴로서 자루가 없고 가장자리가 밋밋하여 가느다란 모양을 하고 있다. 이 교수는 이 부분에서 옛 김해만이 내륙 깊숙이좁고 기다랗게 위치했다는 사실을 추론해 낸다. 즉, 항구로써 제격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근대의 개념으로 접근할 경우, 항구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수심이 깊고 조석간만의 차가 크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산업혁명 이후에 스크루를 이용하는 배가 나왔기 때문이고, 옛날에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수심이 얕고 조석간만의 차가 큰 곳이라야 항구로써 제대로 기능할 수 있었다. 물건을 싣고 내리는 일이 용이하고, 간단한 제반시설만 갖춰도 됐었기 때문이다.
 

◆ 관동리 유적 - 항구 흔적 곳곳에

이와 관련해, 지난 2002년과 2003년에는 봉황대에서, 2005년에는 장유면  관동리에서 김해가 항구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발견됐다. 항구의 호안시설과 나무다리처럼 돌출시켜 배를 댈 수 있도록 한 선착장 잔교, 창고형 건물자리, 항구 배후도로 등이 우리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시에서는 봉황대 한 켠에 가야시대 선착장을 재현해 놓았는데, 연못을 만들어 잔교를 설치하고 가야의 배를 띄워 놓았다. 부근에는 물이 닿지 않도록 바닥을 높여 지은 '고상 창고'가 재현돼 있어서, 배에서 물건을 내린 후 창고에 저장하는 가야인들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진다.
 
마찬가지로 관동리에도 풀밭에 선착장이 재현돼 있다. 작은 나무조각들로 옛날의 해안선을 표시해 두기도 했다. 비록 눈앞에 바다는 펼쳐져 있지 않지만, 유적지를 쭉 둘러보다 보면 그 시대의 해안선을 자연스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김해가 국제 교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또 있다. 3세기 중후반 중국의 진수가 쓴 <삼국지> '왜인전'에는 황해도의 대방군에서 일본열도의 왜국에 이르는 바닷길이 기록돼 있다. 황해도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다 남해에 들면서부터는 동으로 방향을 바꿔 구야한국에 이르고, 1천 리의 바다를 건너 쓰시마, 다시 1천 리를 건너 이키, 또 천 리를 건너 규슈 북부에 다다른다고 돼 있다. 여기에 나오는 '구야한국'이 가야, 즉 지금의 김해를 말한다.
 

◆ 화천 - 한ㆍ중ㆍ일 동시 발견 동전

한 가운데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는, 엽전처럼 생긴 동전 '화천'도 증거물이 된다. 화천은 서기 9년 중국에서 신(新)을 세운 왕망이 찍어낸 돈이다. 10년 정도밖에 사용되지 않았지만, 김해와 평양, 규슈, 오사카 등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삼국지>에 따르면 황해도에서 일본열도를 왕래하는 기간은 대개 2년에서 2년 반이 걸렸다. 화천이 이 바닷길 일원에서 출토됐다는 사실은 김해가 그 당시 교역의 거점 구실을 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교수는 "당시에는 동북아 유일의 무역항 김해가 최고 선진국이었던 중국과 최고 후진국이었던 일본 사이에서 교역의 중심축을 담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김해는 아득한 옛날부터 '국제도시'였던 셈이다. 그 '흔적'은 현재와 미래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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