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곡마을의 자랑인 500년 된 이팝나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나무는 천곡마을이 수분이 많은 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김해시 주촌면 천곡리 천곡(泉谷)마을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샘이 유명한 마을이다. 천곡은 우리말로 '새미실'이라고 부르는데 샘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음을 알려준다.
 
마을의 유래가 된 샘은 마을 입구의 '앞새미'와 학봉산 끝자락의 '뒷새미'로 크게 두 곳이다. 하지만 공장들이 들어서 지하수를 파는 바람에 현재 앞새미는 작은 물 웅덩이처럼 흔적만 남아 있다. 하지만 마을 뒤편 황룡사에 들어서면 아직도 '뒷새미'의 샘물은 솟아나고 있다.
 
뒷새미는 겨울에는 김이 오르고 여름에는 얼음처럼 차가운데다 물맛도 더 없이 좋다고 주민들은 자랑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보호시설을 만들어 둔 채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천곡마을 강상문(58) 이장은 "이곳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좋아 30년 전에는 천곡마을의 양조장이 유명했다"며 "천곡마을에서 생산되던 술은 맛이 좋아 김수로왕 대제의 진상에 올랐었다"고 전했다.
 
천곡마을에 샘이 발달한 이유는 가야시대 이전만 하더라도 천곡마을 앞이 바다였기 때문이다. 이 마을 노인들은 "토양이 머금고 있는 수분이 많아 천곡마을 산자락 어디를 파도 맑은 물이 솟았다"고 기억해 냈다.
 
수분이 많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 마을의 자랑인 500년 된 이팝나무(천연기념물 제307호)가 증명하고 있다. 이팝나무는 농경지 근처나 개울가 등에 잘 자라는, 물을 좋아하는 수종으로 물이 많은 곳에서 잘 자라고 꽃도 피운다. 이 때문에 마을주민들은 지금까지도 이팝나무 꽃의 개화 여부에 따라 한 해 농사의 흉풍(凶豊)을 짐작한다.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아득한 선사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또 천곡리 산 107번지 일대 천곡패총에는 초기 철기시대 유물들이 발굴되기도 했다.
 

 

▲ 황룡사 뒤편에 보존되어 있는 '뒷새미'엔 아직까지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천곡마을 뒷산에 위치한 천곡산성도 마을의 오랜 역사를 뒷받침해 준다. 천곡산성은 경사가 심한 능선 위에 흙과 돌을 쌓아 만든 성곽으로 그 흔적이 가야시대 산성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천곡산성에는 가야시대에 봉화가 들어서 있었는데 천곡산성의 봉화는 가야시대에 주촌면 양동리의 내삼산성과 어방동 분성산성의 중간다리 역할을 했다.
 
천곡마을은 청주 한씨의 집성촌이다. 400년 전 천곡마을에 처음 터전을 잡은 이는 청주 한씨 가문의 22대손 학보(學甫) 한서룡(韓瑞龍)공이다. 마을 뒤편에는 한 공의 묘비와 비석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청주 한씨가 이 마을에 300명 이상 살았다. 때문에 이팝나무 기원제도 청주 한 씨의 후손들이 주도했다. 하지만 현재는 청주 한씨는 20가구 남짓되고 젊은 사람들이 빠져나가 노인들만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 마을 출신 인재로는 15대 국회위원과 김영삼 정부시절 경제수석 비서관을 지낸 한이헌(67) 씨가 있으며 한고희(66) 김해문화원장도 천곡마을 출신이다.
 
논과 밭이 위치했던 이 마을 입구는 현재 공장들이 즐비해 있다. 15년 전부터 시작된 공업단지 개발로 인해 30여개의 공장이 이 마을에 들어선 것이다. 이 마을의 최고령자 한상찬(84) 씨는 "20년 전만 하더라도 마을 입구에 흐르는 천곡천에서 아이들이 멱을 감고 놀았는데 물이 많이 탁해졌다"고 아쉬워 했다.
 
천곡마을은 주촌면 행정의 중심지다. 마을입구에는 주촌면사무소와 농협, 주촌파출소, 우체국 등 공공기관이 모여 있다. 하지만 마을 입구로 들어오는 도로가 협소하고 공장들이 즐비해 마을 입구는 답답한 인상을 주고 있다.
 
강 이장은 "이미 30개가 넘는 공장이 들어와 아름답던 마을 풍경을 가렸고, 기름진 들녘 또한 선천지구 택지개발 사업으로 머지않아 사라질 예정"이라며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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