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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출신 독립운동가 배치문·배동석 목포와 '인연'
  • 수정 2019.02.11 17:06
  • 게재 2019.02.1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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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미디어팀(report@gimhaenews.co.kr)
▲ 배치문 지사의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부와 사진. [사진출처=연합뉴스]


경남 김해 출신으로 3·1만세 시위를 거쳐 의열단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2년 옥사한 배치문 지사.

같은 김해 출신으로 중학생 시절부터 옥고를 치른 데 이어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과 함께 활동하다 귀국,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3·1운동 학생 대표단이었던 배동석 지사.

배동석 지사는 서울과 경남을 오가며 밀사 역할을 겸해 만세 시위를 하다 검거됐지만, 전향을 거부하다 모진 고문을 당한 데다 결핵에 걸려 회복하지 못하고 30대 초반의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두 사람은 독립운동사 불모지에 가까운 김해 출신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최근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두 지사는 특이하게도 경남 출신이면서 멀리 전남 목포에서 활동한 공통점이 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만주와 상해 임시정부 등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벌인 점도 닮았다.

오는 13일 오후 김해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제1회 김해 3·1독립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에서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장이 '배동석 지사의 3·1독립운동과 김해 만세시위', 광주시 동부교육지청 권도균 연구사가 '배치문 지사가 목포와 만주 등지에서 벌인 독립운동'을 주제로 각각 발표한다.

두 사람의 행적은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단일 논문으로도 발표되지 않았다.
 

▲ 김해시 삼계동 화정공원에 자리한 배치문 지사 기적비. [사진출처=연합뉴스]


배치문 지사는 1890년 경남 김해 한림면 안하리 어은부락에서 태어나 김해 보통학교를 17세에 졸업한 후 1909년 20세에 가족과 함께 목포로 이주했다.

1919년 목포의 3·1운동인 4·8만세운동을 주도, 목포 중심가에서 만세시위 중 체포돼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0년 4월 석방돼 목포청년회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1921년 3월 중국으로 망명, 1923년 상해임시정부 국민대표자회의에 '보천교' 대표로 참석, 의열단과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전달하고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한 뒤 국내에 잠입해 활동했다.

1924년 의열단 사건으로 검거됐으나 무죄로 방면됐다. 이후 목포와 전남지역 노동·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1926년 7월에 검거됐다.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했다. 이듬해 석방 후 신간회 목포지회 활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여파로 일어난 목포학생사건을 지도했다. 한때 조선일보·동아일보·호남평론 등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941년 '일본의 대동아전쟁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이니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1942년 53세의 나이로 해방을 보지 못하고 목포교도소에서 옥사했다. 그를 밀고한 이는 목포학생사건에 가담했다가 일제 밀정 노릇을 조건으로 출감했던 정병칠이었다.

1989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당질인 배종록은 그의 호 고파(高波)는 고향 김해와 20대 이후 근거지였던 목포가 바다라는 점을 상징하고, 조국 광복에 대한 높은 기상을 나타낸다고 밝혔다.
 

▲ 배동석 지사가 치료를 받던 세브란스 병원 결핵병사. [사진출처=연합뉴스]


김해 동상동 901번지에서 배치문 지사보다 1년 뒤인 1891년 태어난 배동석 지사의 삶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894년에 설립된 김해장로교회 창립자 배성두의 아들이다. 한약방을 운영하던 배성두는 김해 지역에 선교하기 전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여 스스로 교회를 세웠다. 3·1운동 이전 이미 대구 계성학교에 다닐 때부터 독립운동에 관계돼 일제로부터 3개월간 고초를 치렀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1910년 목포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다시 배일 혐의로 체포됐다. 목포에 갔을 땐 같은 김해 출신인 배치문이 1년 전 먼저 가족과 함께 목포로 이주한 뒤였다.

그 후 만주로 망명해 김좌진과 함께 활동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918년 귀국해 늦은 나이에 세브란스 연합 의학전문학교에 입학, 의사의 길을 가던 중 3·1운동과 만났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배동석은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 공원 독립선언식에 참석했으며,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 광장에서 학생단의 제2독립만세시위에도 참석했다.

성품이 곧고 대한독립의 의지가 확고했던 배동석은 독립운동에 오랫동안 참여해 온 경력이 있음에도 관련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로부터 심한 고문을 받았다.

배동석의 막내처남 김필오에 의하면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의 회유와 전향을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했던 이는 유관순과 배동석 두 사람이었다고 한다. 결핵에 걸렸던 그는 병보석으로 나와 치료 중 1924년 8월 29일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부인 김복남은 서대문감옥에서 고문으로 눈알이 빠지고, 손톱·발톱이 다 빠져서 나온 남편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정신이상에 빠져 친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검거됐더라도 심한 고문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는 의사로서 사회에 봉사하며 살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김해뉴스 디지털미디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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