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이르는 길
한반도 남부의 가야에서 일본열도 서북단 규슈에 이르는 바닷길은 이미 1700년 전에 중국 사람 진수에 의해 기록되어있습니다. 3세기 후반 무렵에 펴낸 삼국지 '왜인전'의 첫머리에는 당시 중국 군현의 대방군(현 황해도로 추정)에서 한민족의 소국들이 있는 마한의 서해안과 변한의 남해안을 거쳐 일본열도 왜인들의 나라에 도착하는 경로가 상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 김해시 봉황동에 마련된 회현동 패총전시관.



삼국지 왜인전에 기록된 뱃길
회현리 엽전 화천이 주요 물증

6세기 중반까지 활발한 교류
일본 땅 이름 등엔 가야 흔적 



"왜인은 대방 동남쪽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 산과 섬에 나라를 세웠다. 옛날 100여 나라 중에 한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있었는데 지금은 통역을 통해 30여 나라가 교류하고 있다. 대방군에서 물길로 바닷가를 따라서 한국을 거친다. 남쪽으로 가다 동쪽으로 7000여 리를 가면 물길 북쪽의 해안에 있는 구야한국(狗邪韓國)에 도달한다. 여기서 1000여 리의 바다를 건너면 쓰시마국(대마도)에 이른다. 쓰시마국은 넓이가 400여 리 정도 되는 외딴 섬인데, 땅은 험하고 숲이 깊다. 길은 날짐승이나 사슴의 길처럼 좁으며, 1000여 호가 살지만 좋은 밭이 없어 해물을 먹고 살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다니며 교역한다. 쓰시마국에서는 대관(大官)을 히코(卑狗)라 하고 부관(副官)을 히나모리(卑奴母離)라 한다. 쓰시마국에서 남쪽으로 한해라는 바다 1000여 리를 건너면 이키국에 이르는데, 사방 3백여 리 정도의 넓이로 대나무가 많고 숲이 울창하다. 약 3천여 호가 밭을 가지고 있지만, 경작해도 먹기에 부족해 남북으로 교역한다. 이키국에서도 관리를 히코와 히나모리라 부른다. 여기서 다시 바다를 1000여 리를 건너 마쓰라국에 도달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 왜인전)
 


■서·남해 연안 항해
중국 대방군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황해도에서 출항해 "서해안을 내려가다 '땅끝마을'의 해남 앞바다를 돌아 남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가다 보면 구야한국에 도착하는데, 그 사이에 여러 한국들을 거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한국이란 같은 '삼국지' 한전에 마한과 변한으로 기록된 나라들로 당시 서해안과 남해안에 인접해 있던 조그만 나라들에도 들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야한국=구야국=가야국=김해
여기서 구야한국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가는 뱃길에 들렀던 지역 중 유일하게 나라 이름이 기록된 곳이었습니다. 당시 마한에 54국, 변한에 12국이 있었지만, 구야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들렀던 서해안과 남해안의 나라들은 모두 아울러서 간단하게 한국이라고 부르면서 구야한국만은 특별하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만큼 구야한국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뱃길에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말해 주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구야한국은 바로 앞에 편성된 '삼국지' 한전에서 구야국(狗邪國)으로 기록된 나라였습니다. 구야국은 다름 아닌 가야국으로 '삼국유사'에서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이 가야국이라고도 했다는 바로 김해의 가야국이었습니다. 서북한의 중국 군현에서 일본열도의 왜국에 이르는 바닷길에서 가장 중요한 기착지였기 때문에 유일하게 국명이 기록되었던 겁니다.
 

▲ 화천이 출토된 김해 봉황동 유적지.


■진수는 분명히 한국이라 했다
이렇게 구야한국은 가야의 구야국이었는데, 왜를 기록하는 '왜인전'에서 나오는 대목이기 때문에, '삼국지'를 쓴 진수는 읽는 사람이 헷갈리지 않도록 구야국에 한(韓)을 추가했던 것입니다. 삼국지 '한전'의 변진조에서는 구야국이라고만 했지만, 왜로 가는 바닷길을 소개하는 왜인전에서는 "구야국은 왜인의 나라가 아니올시다"라는 말로 확실히 짚어준 것입니다. 그런데도 과거 일본제국주의 식민사관론자들은 구야한국이 '왜인전'에 기록되었으니 김해의 구야국, 다시 말해 가야국은 왜국이었을 뿐 아니라 왜가 지배한 영역이었다는 '억지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 이 문제를 새삼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김해를 비롯한 가야의 여러 나라가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중요 경유지였고, 출발지이기도 했다는 기록과 각종 유물이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그 누구보다도 가야가 먼저 일본열도의 왜인들과 통하고 있었던 역사적 전통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 봉황동 회현리 패총 ‘화천’

■봉황동 회현리 패총의 화천
1933년 김해 봉황동에서 회현리 패총에서 발굴된 화천(貨泉)이라는 동전 한 잎은 가야와 왜가 이른 시기부터 바닷길을 통해 오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화천은 전한 뒤인 서기 8~23년에 새로운 왕조를 세운 왕망이 만들었던 30종류 정도의 엽전입니다. 화천이 발행된 시기는 서기 14~40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화천은 평양의 낙랑 토성, 해남의 군곡리 패총, 김해의 회현리 패총, 쓰시마의 시게노단 유적, 이키의 하루노츠지 유적, 규슈 북부 이토지마의 미토코마츠바라 유적, 사가의 요시노가리 유적과 같은 이 바닷길이 닿는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 한번 오가는데 2년~2년 6개월이 걸렸을 것으로 추산되는 바닷길에 10~20년 정도밖에 유통되지 않았던 화폐가 출토된다는 것은 지역 간 교류가 아주 빈번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바닷길의 중심에 김해의 가락국을 비롯한 가야의 여러 나라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실은 김해를 비롯한 남해안의 가야지역에서 출토되는 중국과 일본 계통의 유물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1~3세기 무렵 김해의 가락국을 비롯한 가야제국들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항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 일본 궁내청 서능부에 보관된 '삼국지 위서 동이 왜인전'.


■가야 찾으러 일본에 가십시다
이처럼 가야인 들은 아주 옛날, 한민족 중에서 처음으로 일본열도를 오가면서 문화를 교류하는 물결 속에서 6세기 중반까지 일본열도에 적지 않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삶의 터전을 아예 일본으로 옮겨갔던 가야인 들의 흔적이 무려 1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적지 않게 남아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고대 문헌자료나 고고 자료 뿐만 아니라 각종 지명이나 전승 등을 통해 가야의 흔적들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료들을 통해 먼 옛날 왜국과 정치적으로 교섭하거나 개인적으로 이주했던 가야인들의 흔적을 찾아 일본열도로 떠나 보려 합니다. 필자와 함께 "가야 찾으러 일본에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김해뉴스 이영식 인제대 인문융합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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