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대 이영식 교수는 허왕후가 인도에서 온 게 아니라고 보는 입장이다.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 중 '가락국기'에 따르면 허왕후는 20명 가량의 일행과 함께 가야로 왔으며, 2대 거등왕과 3대 마품왕은 각각 이 허왕후 집단에서 태어난 딸을 왕비로 맞았다. 이 교수는 그러나 "이들의 인도제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이 교수는 일연스님이 허왕후가 가져온 물건들을 열거하면서 '한사잡물(漢肆雜物)', 즉 '한나라의 여러가지 사치스러운 물건들'이라 쓴 점으로 미뤄, 허왕후가 인도가 아니라 옛 중국 서북한 지역에서 건너왔다고 추정한다.


특히 그는 "고조선이 멸망함에 따라 남쪽으로 내려 온 석탈해(신라 4대왕)는 철기문화를 앞세워 가야를 차지하려 했지만 이미 강력한 철기문화를 갖추고 있던 수로왕에게 패해 쫓겨났다"며 "허왕후 집단은 가야에는 없었던 부채 등 선진문물을 들여왔기 때문에 수월하게 가야에 정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고려문화재연구원 김병모 이사장은 허왕후가 인도에서 온 게 맞다는 입장이다. 김 이사장은 "수로왕릉 정문에 새겨진, 물고기 두 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있는 '쌍어문양'은 국기가 없던 시절의 가락국 국장(國章)으로 추정되는데, 인도의 아요디아와 그 주변인 우타르 프라데쉬 지방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수로왕비릉 비석에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기록돼 있는 것을 근거로, 중국 사천성 안악현(옛 보주)을 답사했다. 그 결과 인구 15만 명의 허씨 집성촌이 조성돼 있는 것과 1~2세기 동한시대에 만들어진 무덤·암벽들에 쌍어문이 무수히 조각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김 이사장은 "후한서(後漢書)에 '보주 땅에서 서기 47년 민중 봉기가 일어나 한(漢)정부와 공방전이 있어, 그 결과 봉기를 일으킨 원주민 7천 명이 강제로 추방돼 오늘날 무한지방으로 떠난 사건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며 "허왕후는 인도 출신 소수민족이 중국에 정착하는 동안 보주에서 태어난 인물로, 봉기 이후 고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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