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권 시인

요즘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왜 인문학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인문학이란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 그리는 무늬, 인간이 가야할 방향을 찾아가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의 발달은 부의 축적을 가져왔지만 인간을 기계화 시켜버렸습니다. 그러다 기계화 된 사람들이 기계로부터 해방을 외치면서 인간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강한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인문학적 통찰을 통해 종속적인 삶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찾아보자는 것이겠지요. 여러 시대를 겪고 나온 우리들이 여기까지 와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읽어버린 지금, 길 위의 인문학이란 명제를 들고 그 길을 찾아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살구씨를 행인(杏仁)이라 하는 것도 씨는 곧 뿌리를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나는 지금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의식의 고정화는 곧 자기의 무장된 신념과 이념입니다. 관념화된 이것을 버리기엔 결단이 따르겠지요. 관념은 내가 만든 것 보다 외부의 요인들이 내 몸 속으로 들어와 굳어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적 다수가 합의해 만든 규범이 내 생각의 틀에 박힌 것입니다. 이것을 깨뜨리고 자발적 자신의 깨달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요즘 시 속에서는 많은 파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명한 것에는 의문을 가지지 않습니다. 즉, 자명한 것에는 고정화된 관념으로 생각의 문을 닫아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명한 것에 의문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의식의 영토는 확장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장 큰 생각의 틀을 파괴한 것은 신을 부정한 일이었겠지요. 곧, 철학에서 이야기 하는 신의 세계에서 생각의세계인 나로 넘어 간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은 무엇으로부터 종속에서 벗어나 완전한 주체적 자아를 발견하자는 것이겠지요.

생각의 틀을 깨기 위하여 시집 한권을 꺼내 들었습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를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아가보자는 것입니다. 시집 속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은유를 물고 왔습니다. 시에서는 작은 은유 하나가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이 은유가 시뿐만 아니라 일상 곳곳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은유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은유는 느림의 미학으로 생각의 즐거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산책의 즐거움은 풍경의 음미에 있을 것입니다. 유유자적 걸어가면서 풍경을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과정 속에 즐거움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나 글을 읽는 독자도 언어의 산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기존의 서정은 추상적이고 정형적이었다면 현대서정은 개방적인 포용력과 현실적인 구체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공감대입니다. 친숙한 것과 낯선 것에 발견과 재발견이 일어나면서, 자신이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않은 것에 의식을 갱신하는 상상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산업사회의 도래로 일상적인 조건들이 일의 노예로 만들었으며 모든 가치가 소비대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려울수록 한곳을 같이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는 시인을 부족방언의 예술사라 했습니다. 시인은 모어를 최대한 세련화해서 정서적 감정, 인지적 감정을 깊이 고양시키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언어정책은 표준어맞춤법을 통해 언어 보급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시와 관련해서  볼 때, 표준어의 효율성과 통합성에는 동의하지만 아름다운 토속 언어가 사장된다는 것에는 안타까움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시집을 여는 순간 독자는 타인의 고백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자기 정서와 맞지 않을 때 이질감, 거부감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쇄된 문장이 누군가 나에게 말하고 있는 살아있는 너라고 인식한다면 대화가 가능해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고 있는 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언어의 구체성 쪽으로 진입하게 되는 일입니다. 나는 지금, 나의 모든 마음을 열고 너의 시집을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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