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정마을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이 연못의 한 가운데에 재실(모선재)이 있었지만 지금은 연못 밖으로 옮겨졌다. 김병찬 기자 kbc@

김해시 진례면의 중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옛날 '벽송정'이라 불리던 마을이 있다. 소나무가 많은 산이 휘감고 있어 송정마을이라 불리는 이곳은 멋스러운 옛 마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송정마을이 처음 생긴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년 전. 650여년 전쯤 송정마을 위 산 골짜기 쪽에 위치해 있던 대동(大洞)이라는 마을에서 살던 사람들이 평야로 내려오기 시작한 때라고 한다. 김해 사충신의 한 사람인 송빈 공의 둘째 자녀인 송정남 선생이 송정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지는데, 청주 송씨들의 집성촌이었던 이곳은 이제 여러 사람들이 들어와 함께 모여 사는 마을이 됐다.
 
한때 100여 가구가 넘게 살고 있었던 송정마을은 그 수가 절반 정도로 줄어 현재 50여 가구 70~8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젊은 사람들 대부분이 객지로 나가고 아기 울음소리가 끊긴 지 10년 정도 됐지만 객지로 나갔다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주민들은 주로 논농사를 짓고 있으며, 수확한 쌀은 먹을 만큼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수매를 하고 있다.
 
▲ 마을회관 뒤편엔 오래된 회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송정마을은 들어서는 입구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지금처럼 도로가 넓지 않았을 때 마을 입구에 있던 500~600년 된 나무들의 가지가 길위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고 한다. 좁은 길 위에 늘어져 있는 가지와 뿌리 때문에 차로는 도저히 들어올 수가 없어 걸어서 마을로 들어와야 했다고. 지난 1959년 태풍 사라가 한반도를 강타했을 때 나무들은 사라져 버렸지만 마을의 길 위에 오래된 나무가 나뭇가지를 늘어뜨리고 뿌리를 내렸을 모습을 상상하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마을로 들어서서 왼쪽을 보면 연못이 눈에 띄는데 대량 6천300평 규모라고 한다. 이 연못에는 연꽃 씨앗뿐만 아니라 뿌리들도 많이 남아 있어 꽃이 피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연못 한가운데 연당이라고 해서 지금의 재실(모선재)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낚시도 하고 한시 백일장도 열렸었죠. 호랭이라고 불렀던 어르신들이 담뱃대를 물고 연당까지 똑딱배로 왔다갔다 하셨어요." 송정마을 송충복(64) 이장이 기억하는 연못의 모습이다. 송 이장은 "연꽃이 가득 피는 이 연못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며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던 시절에 연뿌리를 캐서 나눠먹곤 했다"고 말했다.
 
이후 연못 한가운데 있었던 재실이 조금씩 무너져 주민들은 재실을 연못 밖으로 옮겼다고 한다. 마을에는 대산재, 도강재, 모선재, 운강재 총 4개의 재실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선재와 운강재 2개의 재실만이 남아 있다.
 
▲ 마을 공동우물로 사용됐던 고괴천 우물.
입구에서 조금 더 올라오면 마을회관이 보이는데 회관 옆에는 마을의 역사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마을회관을 두고 오른편에 연못에서 옮겨진 모선재가 보이며 회관 뒤로 올라가면 커다란 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지나온 세월을 말해주는 듯 크고 단단해 보이는 회나무 앞에는 마을에서 썼던 우물이 있다. 고괴천이라 불리는 이 우물은 나무뿌리 때문인지 물이 유독 맛이 있었다고 한다. 예부터 식수로 사용했던 고괴천 우물은 송정마을 주민들에게 아직도 소중하게 여겨지는 듯했다.
 
회나무 옆에는 '벽송정 신설로 비'가 있는데 광복 이후 마을에 새롭게 도로를 내면서 세운 비라고 한다. 원래는 마을 입구에 있었는데 뱀이 비석을 감고 돌았다 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비에 새겨진 글은 아석 김종대 선생의 글씨다.
 
마을에 있는 공장 자리는 옛날엔 소나무로 가득한 솔밭이었다. 송우진(65) 씨는 "솔밭이 남아 있었다면 지금쯤 훌륭한 곳이 되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보였다. 송 씨는 "마을의 좋은 장소들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마을을 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며 "한편으론 창원으로 가는 터널이 뚫리게 되면 이곳도 도시화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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