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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 가야산은 일본 문화 발상지이영식 교수의 가야 찾아 일본 간다 ⑦
  • 수정 2019.06.04 13:20
  • 게재 2019.05.21 14:29
  • 호수 423
  • 6면
  • 이영식 인제대 인문융합학부 교수(report@gimhaenws.co.kr)
▲ 대한해협이 시작되는 바다(왼쪽)와 만나는 가야산(오른쪽). 일본 문명의 발상지로 불리는 곳이다.


합천 가야산과 이름 같은 산
산꼭대기 자리잡은 '가야 신사'

산기슭에는 '가야의 들' 마을
제철시설 등 철기 유적 발굴



■ 후쿠오카의 하카타항을 향해서
이키섬의 아시베항을 떠나 규슈 북부, 아니 일본의 현관인 하카타(博多)항으로 갑니다. 하카타는 규슈 중심도시 후쿠오카의 옛 이름이기도 합니다. 하루에 두 번씩 오가는 페리로 1시간 남짓이면 항구에 도착합니다. 하카타항은 전근대의 일본열도가 외국의 선진세계와 처음 접촉하게 됐던 국제교류의 창이었습니다. 가야와의 왕래로 시작된 국제교류는 고구려·백제·신라로 확대되었고, 중국왕조와의 교류로 확대됩니다.
일본인의 생존과 일본문화의 근본이었던 쌀농사와 금속기의 전래부터 시작된 선진문물의 전파는 하카타를 '일본문화의 발상지'로 부르게 했고, 고대 동아시아의 외교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전진기지였습니다. 근·현대 미국 페리 제독의 쿠로부네(증기선)가 1853년 7월 8일에 요코하마에 등장하면서 국제교류의 중심이 태평양 쪽의 고베·요코하마·도쿄 등으로 옮겨가기 전까지는 서양문물도 중국에서 이곳을 통해 수입되었습니다.
하카타항은 전근대의 일본인들이 선진세계와 접하던 일본열도의 대표 항구였습니다. 하카타의 어원은 '넓을 박(博)'에 '많을 다(多)'로 곧잘 "토지가 넓고 물산이 많은 곳"이라 합니다만, 796년에 편찬된 '속일본기'는 '박다대진(博多大津)'으로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넓다(博)'는 다양하다는 의미로 다양한 외국의 물건이 많이(多) 들어오는 큰(大) 항구(津)라는 뜻이 더 어울립니다.
이런 선진문물의 선두를 장식한 것이 다름 아닌 가야의 산물이었습니다. 관련유적과 출토유물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살펴볼 테지만 오래된 지명 전승에도 그런 흔적들이 잘 남아 있습니다.

▲ 고대 일본 사람들이 선진 가야 문물을 받아들였던 하카다항의 오늘.

■ 하카타항은 가야와의 교역으로 개항되었다
하카타가 항구로 기록된 최초의 이름에는 나노츠와(那津) 아라츠가 있습니다. '일본서기' 선화1~2년(536~537) 조에는 나노츠에 군량 창고 즉 미야케(官家)를 설치해 신라에 시달리던 임나 곧 가야를 돕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문자그대로를 사실로 볼 수는 없지만, 하카타항의 최초의 이름에 가야 관련 전승이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나노츠 곧 나(那)의 나루(津)라는 이름은 '나라의 나루'였겠지만, 임나의 나루 곧 임나로 가는 나루를 뜻하기도 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7세기 후반 ~ 8세기 후반 경의 '만엽집'이 전하는 '아라츠'도 거친 바다의 나루라기 보다는 가야의 아라로 가는 나루가 하카타항의 오래 된 이름으로 남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전근대 일본열도의 핵심 창구였던 하카타 항구의 기원이 가야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6세기 전반 경에 경영되었던 '나노츠 군 량창고'의 실체는 1980년대 후쿠오카 시내 히에 유적의 발굴을 통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만, 이런 생각은 1986년도 히에 유적 여름 발굴 2개월의 참가로 탈진했었고 공황 장애까지 앓게 되었던 오래된 추정의 하나였습니다.

▲ 가야산 정상에 자리잡은 '가야 신사'.

■ 일본에서 처음 만나는 이정표가 가야산이다
다만 우리가 하카타항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배의 전방을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후쿠오카 시내가 어슴푸레 보이기 시작할 때 오른쪽 앞바다 위에 혼자 불쑥 솟아 있는 산 하나를 찾아야 합니다. 츠쿠시의 후지산이라고도 불리는 가야산(可也山)입니다. 츠쿠시란 규슈 북부지방의 옛 이름이고, 후지산은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다만 가야산의 실제 높이는 365m밖에 되지 않습니다. 3,776m나 되는 진짜 후지산에 비할 수도 없고, 같은 규슈에도 보다 높은 산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 산이 규슈의 후지라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평야 위에 혼자 솟아오른 모습이 후지산 같기도 하고, 바다 위에서 처음 만나니 그만큼 높게 보이기도 하지만, 가야산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가야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후지산이 일본열도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가야산은 규슈를 대표하는 산입니다. 바로 동쪽에 접해 있는 하카타항으로 수입된 선진문물들은 일본문화의 출발과 발전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수입 문물의 선두를 장식한 것이 가야였고, 쓰시마와 이키를 거친 가야인들이 바닷길의 이정표로 삼았기에 가야산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가야의 문물로 시작된 '일본 문화의 발상지'란 자부심이 별로 높지 않은 가야산을 후지산으로 불리게 했고, 가야인들의 거주와도 관련되었을 것입니다. 규슈의 가야산(可也山)은 합천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伽倻山)과 같은 이름이고 우리가 찾고 있는 가야(加耶)입니다. 한자는 다르지만 가야라는 같은 소리를 다른 한자로 표기했을 뿐입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열도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이정표가 가야산입니다. 가야산은 후쿠오카 서쪽의 이토시마 반도가 대한해협으로 돌출해 있는 곳에 있습니다. 일본열도의 왜인들에게 최초의 외국이 가야였던 것처럼, 대한해협을 건너기 시작했던 가야의 항해사들이 이정표를 가야산이라 불렀던 것이 지금까지 일본지명으로 남아 있는 겁니다.

■ 가야산 주변의 가야계통 지명들
가야산 주변의 지도만 봐도 가야계통의 지명들은 수없이 많이 발견됩니다. 하카타항 입구에는 가야를 비롯한 외국배들이 정박했던 '카라토마리(唐泊)'가 있고, 서쪽에는 카라츠(唐津)시로 들어가는 카라츠만이 있습니다. 이 카라가 가야의 가라에서 비롯되었음은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가야산이 대한해협으로 뻗어 나간 끝에 유명한 명승으로 대문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그 이름이 '케야의 대문'입니다. '가야의 대문'일 겁니다. 결국 가야산을 바라보고 도착하던 해변도 가야(케야)였고, 상륙해 들어서던 곳도 가야의 대문이었던 겁니다. 가야산 정상에는 가야(可也)신사도 남아있습니다.

▲ 타타라 제철로를 재현한 모습.

■ 가야산 기슭에는 가야인이 살던 마을이 있었다
가야산이 대한해협으로 뻗어 나간 곳이 타타라곶(タタラ崎)입니다. 타타라는 가죽 부대를 판자 사이에 놓고 발로 눌러가며 제철로에 강한 바람을 불어 넣던 풀무입니다. '일본서기'에는 타타라로 표기했는데, 부산의 다다라(多多羅; 다대포)나 경남 합천의 다라(多羅; 옥전 고분군) 같은 가야의 지명도 동일한 글자로 표기했습니다. 가야 제철기술의 전파와 제철 집단의 이주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가야산 아래 타타라곶 가까운 곳에서 야쿠마 제철 유적과 미토코마츠바라 마을 유적이 발굴되었습니다. 1981년에 야쿠마 제철 유적에서는 7기의 제철로와 대형 트럭 여러 대 분량의 슬래그(쇠똥)와 다수의 송풍관 편이 검출되었고, 1982년에 미토코마츠바라 유적에서는 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경의 야요이시대와 4세기경 고분시대 전기에 형성된 105동의 주거지와 함께 중국화폐 화천과 반량전이 출토되었는데, 가야하라(可也原) 곧 '가야의 들'이라고도 부릅니다. 제철 기술과 집단의 계통에 대해서는 가까운 가야지역을 지목하는 게 보통이고, 중국화폐 화천과 반량전은 경남 사천의 늑도유적, 창원 다호리유적, 김해 회현리 패총 등의 가야지역에서 빈번하게 출토되는 유물입니다. 일본열도 제철 기술의 시작을 장식했던 가야인의 이주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가야산 정상에 있는 가야(可也)신사는 이들이 조상신을 섬기던 자취로 생각해야겠습니다.김해뉴스 이영식 인제대 인문융합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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