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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수준 높은 문자 문화 꽃피워가야 문화 복원 프로젝트 (2) 가야 사람들이 남긴 기록, 문자
  • 수정 2019.06.18 16:29
  • 게재 2019.05.28 16:42
  • 호수 424
  • 4면
  • 이현태 국립김해박물관 학예연구사(report@gimhaenews.co.kr)
▲ 창원 다호리 1호분 출토 붓.

 

합천·산청 출토 유물서 명문 발견
가야 문자자료 모두 5~6세기 해당
사람들이 직접 남긴 생생한 기록
대가야 국가 발전 단계 진전 시사
문자기록법이 갖는 의미 연구 필요





오래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예전에 끼워둔 낙엽 한 장을 마주할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나뭇잎에 불과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추억의 산물이다. 고대 사람들이 남긴 문자자료도 이와 비슷하다. 토기를 비롯해 일상생활 용기에 새긴 단편적인 글자부터 쇠로 만든 종이나 돌로 만든 비석에 글자를 새긴 금석문에 이르기까지 문자자료의 범주는 무척 넓다. 토기의 한쪽에 새겨진 문자는 비록 그 내용은 소략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직접 남긴 생생한 기록이란 점에서 소중하다. 가야의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에 비해 문헌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가야 사람들이 남긴 문자자료는 더욱 의미가 있다.


■ 중국 통해 문자 문화 수용
1988년 국립중앙박물관은 창원 다호리에서 도굴의 피해가 심했던 무덤 1기를 발굴 조사했다. 기원전 1세기 중반~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 내부에서는 붓이 출토됐다. 그리고 사천·김해와 같이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무역의 거점 지역이나 밀양과 창원 등 해안에서 내륙으로 진출하기 수월한 지역에서는 중국에서 제작된 문자가 새겨진 거울이나 동전, 솥 등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러한 양상은 가야의 성장 기반이 되는 지역에서 일찍부터 중국을 통해 문자 문화가 수용됐고 문자를 사용하기 위한 여건이 마련됐음을 알려준다. 특히 창원 다호리에서 출토된 붓은 수입품이 아니라 자체 제작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기원 전후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문자를 사용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이른 시기부터 문자가 사용되었지만 중국에서 제작된 외래품을 제외하면 가야 사람들이 남긴 문자자료의 양은 매우 적은 편이다.
 

▲ 산청 하촌리 유적에서 나온 ‘이득지’ 명문이 적힌 사발.


■ 합천·산청 등지서 명문 새긴 유물 출토
현재까지 알려진 가야의 문자자료로는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라는 명문이 새겨진 짧은 목항아리가 있다. 1986~1987년 합천댐을 건설하기에 앞서 수몰 예정 지역인 저포리를 발굴조사 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것이다. 또한 1989년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에서 발견된 '합천 매안리'와 2008~2009년 산청군 생초면 하촌리 일대의 도로 확장 부지를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득지'라는 명문이 새겨진 손잡이 달린 사발이 해당된다. 뿐만 아니라 합천에서 출토됐다고 전해지는 긴 목항아리도 포함된다. '대왕(大王)'이란 글씨가 새겨진 뚜껑 있는 항아리로 현재 충남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외에도 창녕 등지에서 출토된 명문이 새겨져 있는 큰 칼이 있지만, 가야의 문자로 볼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어서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 ‘대왕’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긴목 항아리. 합천에서 출토됐다.


■ 대가야의 부(部) 존재· 왕의 위상 확인
합천 저포리에서 출토된 대가야 양식의 짧은 목항아리에 새겨져 있는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라는 명문은 하부에 소속된 사리리라는 인명을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명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였던 것은 하부라는 구절이었다. 이를 통해 대가야에도 다른 삼국과 마찬가지로 부(部)가 존재하였던 사실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뚜껑과 긴목항아리에 각각 '대왕(大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뚜껑 있는 긴 목항아리도 6세기 전반에 유행한 전형적인 대가야 양식 토기에 해당한다. 대왕이란 명문은 6세기 전반 대가야 왕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데, 합천 저포리에서 출토된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명 짧은 목항아리와 더불어 대가야가 다른 가야에 비해 한 단계 진전된 국가 발전 단계에 이르렀음을 뒷받침한다. '합천 매안리비'에는 6세기 전반 가야의 수장으로 추정되는 수십 명의 간지(干支)들이 모여 모종의 회의를 하였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비록 판독이 가능한 글자가 많지 않아서 그 이상의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가야 비석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 합천 매안리비 탁본(왼쪽), 간지가 새겨진 부분(오른쪽).


■ 가야 문자자료 모두 대가야 관련
현재까지 알려진 가야의 문자자료는 시간적으로는 5세기 말~6세기 전반에 해당하며, 모두 대가야와 관련된다. 대가야는 479년 중국 남제(南齊)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교섭할 정도로 수준 높은 문자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대가야의 문자자료가 바로 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야와 관련된 문자자료가 유독 대가야와 관련된다는 사실은 대가야가 다른 가야에 비해 국가 발전 단계가 진전되었음을 시사한다.

 

▲ 합천 저포리에서 출토된 짧은 목 항아리. ‘하부사리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 문자 기록 방법은 풀어야 할 과제
이처럼 가야의 문자자료는 당시의 정치·사회적인 상황이 반영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글자를 새긴 방법 등에서 흥미로운 점이 확인된다. 산청 하촌리 유적에서 출토된 '이득지'라는 인명이 새겨진 손잡이 달린 사발의 경우, 토기를 거꾸로 세운 상태에서 토기 내면에 글자를 새겼다. 토기에 명문을 새기는 경우에는 토기 외면을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굳이 글자를 새기기 힘든 토기 내면에 그것도 토기를 거꾸로 세워서 글자를 새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충남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대왕'명 항아리의 경우 긴 목항아리에 새겨진 '대왕'이란 명문은 글자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새겼다. 이와 달리 뚜껑에 새겨진 '대왕'은 마치 왼손으로 쓴 것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아래에서 위로 글자를 새겼다. 주술적 성격이나 신비로움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명문을 새겼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지만, 그 이유는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처럼 남겨져 있다. 최근 가야 유적의 발굴조사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어서 가야와 관련된 문자자료의 수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김해뉴스

 

 

이 현 태
국립김해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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