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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단상오늘의 수필
  • 수정 2019.06.12 10:35
  • 게재 2019.06.12 10:28
  • 호수 426
  • 11면
  • 김경희 김해수필협회 회장(report@gimhaenews.co.kr)
김경희 김해수필협회 회장

밤은 낭만적이다. 해질 무렵이면 한적한 곳에서 노을을 감상하는 버릇이 있다. 한풀 꺾이는 시간이 되면 모든 것에 진실해진다. 지쳐있는 삶을 다독이는 어머니 품같은 밤이 되면 속상함도 서러움도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피로에 눅눅해진 거리에는 작은 불빛들이 하나씩 켜진다. 그리움과 아픔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을 즐길 줄 알아서 인지 늘 나만의 시간은 밤에 이루어진다.

불빛을 좋아하는 족속들이 몰려오는 거리를 배회하는 것도 내겐 낭만이다. 어둠은  찬란했던 낮 시간의 영역을 사정없이 점령한다. 밤길을 걷는 이의 모습도 제각기 다르다. 소금에 절여진 배춧잎 같은 무거운 발길을 내려놓기 위해 집으로 재촉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더욱 애잔하다.

밤의 속도는 하절기와 동절기가 다르다. 여름은 낮이 길다 보니 초저녁의 여유를 주지 않고 쏜살같이 깊은 밤을 몰고 온다. 낮이 짧은 겨울밤은 속도가 빨라 초저녁을 잘 다스려야 한다. 초저녁은 절정의 밤을 이어주는 서막이듯이 잿빛 어둠을 갈아 치우는 불빛이 하나, 둘, 무대를 펼치는 안무처럼 현란하고, 분주한 밤손님을 안내한다. 취객들의 비틀거리는 발걸음과 고성방가로 무르익어가는 밤 시간을 알 수 있다.

술집의 밤은 솔직하다. 술기운이 몸속에 번지기 시작하면 얼굴빛부터 반응을 보인다. 잔이 부딪칠 때마다 덮어둔 감정을 들추며 옳고 그름을 우기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연인들의 밤은 황홀하다. 흐릿한 불빛 아래 사랑을 속삭이며 거리를 누비는 실루엣은 마치 연리지 나무처럼 뒤엉킨 것 또한 밤의 배려이다. 불만과 화해가 반복되면서 관계가 돈독해지는 것 또한 밤이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속설처럼 어두운 밤에도 많은 일이 일어난다. 일과 중 가장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도 밤이지만, 피로를 푸는 것 또한 밤의 문화다. 밤 시간은 어쩌면 위로를 받고 싶은 사람과 외로운 사람들의 공간이기도 하고 누적된 하루의 긴장감을 늦추는 가장 은밀한 안식처이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밤이면 원초적인 본능에 충실해진다. 인적이 드문 샛강 둑이 초연하지만 기척만으로도 이곳저곳 풀숲에서 날짐승의 사랑놀음이 한창임을 알 수 있다. 사랑에 빠진 날짐승들은 인기척이 가까워지면 꾸르륵 날아 오히려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조차 놀라게 만든다.

도시의 밤과 달리 들판의 밤은 적막하다. 다문다문 어둠을 안고 호적하게 서 있는 가로등 불빛에 외로움이 흐른다. 도심과 농촌을 이어주는 경관은 밤이 더 매혹적이다. 불편한 시선을 끄는 허름한 건물과 쓰레기를 덮을 수 있는 어둠이 좋다. 나도 허물을 덮고 싶어 이렇게 밤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불빛을 타고 유유히 흐르는 강가에 모인 억새들의 춤사위에 마음이 흔들린다. 매번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무가 우뚝 서 있었지만, 가슴을 쓸어 내는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그래서 밤은 센티멘탈하다.

밤은 세월의 다리를 건너게 해준다. 학창 시절, 저녁이 순식간에 몰려오는 겨울에는 무서움증이 더했다. 귀갓길 차부에 나를 기다려주신 어머니가 있었다. 가끔 어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는 안면이 있는 사람을 따라나서거나 무서움증에 가슴을 조이며 걸어야 했다. 멀리서 가물거리는 불빛 하나가 다가온다. 영락없이 어머니가 든 네모난 등불이다. "엄마" 하고 반가움과 안도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부른다. 엄마는 "희야가! "큰소리로 대답한다. 어머니의 발걸음과 내 발걸음의 간격이 좁혀지고 마침내 합쳐질 때 어머니는 얼른 가방을 받아 머리에 이고 나는 어머니의 야윈 허리를 감으면 '배고푸제!' 하고 안아주셨다. 그 음성이 그립다. 그때 불빛은 어머니의 포근한 품속이고 고향이다. 그 소리를 기억하고 싶어 밤거리를 배회하는지 모른다.

비 오는 밤은 운치가 보탠다. 갓 볶은 커피를 뽑아 자동차에 싣고 집 앞 공원으로 간다. 공원 입구 회화나무 아래에 주차를 하고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하루를 갈무리한다. 밤과 더불어 생각이 깊어진다. 밤비 소리를 들으면 과거가 스쳐가고 현재의 일들을 정리하며, 미래를 키워가는 소중한 시간들이다. 빗방울이 굵어질수록 머릿속이 텅 비어 간다. 불편했던 감정과 쓸데없는 복잡한 생각이 말끔하게 정리된다. '아침에 도를 닦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라는 공자님의 말과 달리 나는 저녁에 도를 닦는가 보다 하고 턱없는 생각도 한다. 한번씩 밤의 소리를 들으면 손가락 마디만큼 생각이 깊어지는 듯하다. 한 모금의 따뜻한 커피가 입안 가득할 때 행복한 생각도 함께 채운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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