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순재 김해성폭력상담소장

지난 5월 시흥시의 한 농로에서 30대 부부와 두 살, 네 살 자녀 등 일가족 4명이 차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같은 달에 의정부시의 일가족 사망사건도 발생했다. 이들 가족은 생활고를 비관해 부모가 자녀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경제적인 문제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변 사람들은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동시에 어린 자식들까지 죽음으로 몰고 간 부모의 비정함에 분노를 나타내기도 한다.

전체 살인 사건에서 가족에 의한 살해가 차지하는 비율이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높다. 2014년 대한법의학회지에 발표된 '한국의 존속살해와 자식살해 분석' 보고서에 의하면 2006년부터 2013년 3월까지 국내에서 발생한 가족 살해는 총 611건(존속살해 381건, 자식살해 230건)으로 연평균 84건에 달했다. 매년 전체 살인 사건의 약 7%에 해당하는 수준인데, 이는 프랑스(2.8%), 미국(2%), 영국(1.5%) 등에 비해 높은 수치다. 부모의 자식살해 230건은 매년 30~40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피해자 연령은 9세 이하가 59.1%, 10대가 27.9% 로 나타났다.

부모 됨을 이유로 자녀를 살해해도 되는 것일까? 부모가 낳았으니 자녀의 생명권이 부모에게 있는 것일까? 동반자살로 포장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참 많은 의문이 든다. 자녀의 입장에서 보면 엄연한 타살이다. 동반자살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살해한 살인 사건인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지적한다.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을 그저 안타깝다거나 가슴이 아프다는 동정론으로만 끝낼 수 없다. 배우자나 자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닌데 잔인한 선택이 원망스럽다거나 잘못된 선택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로만 끝낼 수 없는 문제이다. 의정부 일가족 사망 사건이 알려지면서 딸(18세)의 손등에서 흉기를 막으려고 했을 때 나타난다는 방어흔이 발견됐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가족의 경제를 비롯한 모든 책임을 가장이 져야한다는 가부장제 통념, 일그러진 가족주의에서 탈피해야 한다. 가족은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며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다. 가족 구성원은 독립된 인격체이다.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을 때 자식의 생명마저도 아버지의 뜻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가족 살해가 발생하는 것이다. 동반자살이 아니라 엄연히 타인의 생명을 앗아간 살인이며 범죄인 것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정당화 될 수 없다.

극단적 선택을 막기 위해서는 위기 가정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그렇다면 이웃인 우리의 역할은 무엇일까? 내가 사는 지역이 아니라서 다행으로 여기면 되는 것일까? '자녀 살해 후 자살'의 문제가 그저 잔혹한 가정사이거나 가족 개개인의 문제일까? 왜 우리는 그들에 대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을까? 이웃의 아픔을 외면했던 우리에겐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일까? 벼랑 끝에 몰려 죽음을 생각하기 이전에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창구는 없었을까? 수없이 질문을 해 본다. 허술한 안전망을 촘촘하게 다져야 한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다시 살아야 되지 않느냐는 위로는 또 다른 비난이 될 수도 있다. 고통이 같은 무게로 와 닿지 않듯이 누구나 모든 사람이 역경을 이겨내는 힘은 다르다.   내가 고통을 견디고 일어선 과거가 있으니 누구라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 할 수 없다. 저마다의 삶을 경험을 토대로 저마다의 삶의 방법으로 이겨나갈 수 있도록 이웃의 아픔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관심과 지지가 필요하다. 마음을 열면 '나'가 아니라 '우리'가 보인다. 경제적 도움이나 심리적 지원을 요청하는 무언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역경을 이겨내고 다시 삶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이웃된 서로에게 든든한 토양이 되어야 한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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