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주 아동문학가

간 밤, 내린 여름비에 신록의 나뭇잎들이 떨어진 아침 길은 유난히 쓸쓸한 노래를 부르는 듯하다. 총총 바쁘게 걸음을 옮기지만 오늘따라 문득 주변의 사물들에 눈이 간다. 내게 말을 걸어주는 듯 부는 바람 한 끝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조심스레 손으로 받아보며 '떨어지다'를 중얼거려본다.

떨어지다는 결코 좋은 느낌, 좋은 어감은 아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결과에 대한 아쉬움에 후회가 몰려든다. 면접에 떨어지면 나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경연에 떨어지면 쉽게 수긍하지 못하고 '왜?'라는 의문을 던지게 된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은 굴곡 없는 삶을 산 게 잘 산 것일까? 아니면, 한두 번 떨어지기도 하면서 실망과 좌절을 이겨내고 이뤄가는 것이 잘 산 삶인가 궁금해진다. 돌아보면 나의 일상은 특별한 굴곡도, 위기도 없었다. 모나지 않게 두루뭉술하게 지내왔다. 곰곰 무언가에 떨어진 적이 있었나 생각해본다.

기억에 남는 첫 번째 떨어짐은 모기업의 면접에서다. 그 기업 홍보부에서 사보기자를 뽑았다. 학교의 추천도 받고 평소 관심을 가졌던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하고 싶은 더 큰 열망으로 조교가 되고 싶어서 면접에 성실하게 임하지 못했다. 결과는 탈락이었고 원하던 조교는 되었다. 만약 그때 그 회사를 갔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가끔 생각해보기도 한다. 스스로 정한 틀을 깨지 않고 바른 생활을 최고의 덕으로 여기는 지금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막연하지만 좀 더 큰 세상을 보고 또 다른 꿈을 키우며 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두 번째 떨어짐은 친구와 함께 도전한 운전면허 따기다. 배우기 전에는 겁이 났지만 막상 배우고 나니 운전이 체질인지 강사의 말을 착착 잘 알아들어 연습에서 이탈 한번 없는 언제나 백점이었다.

드디어 면허시험일. 친구는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지만 난 참 담담했다. 긴장하며 떨던 친구는 무사히 합격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별 문제 없이 코스 시험을 통과하고 주행시험을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 출발도 산뜻했고 면허증까지 도달하기 위해서 저 언덕만 넘으면 되었다. 그런데 평소하지 않았던 실수, 언덕에 오르기 전에 시동이 꺼져버렸다. 주르르 미끄러져 어찌할지 몰라 정신을 못 차렸다. 평소 이런 실수를 했다면 어떻게 할 방도를 생각해냈을 텐데 한 번도 없었던 경우라 제대로 당황하였다. 다시 시동을 켜고 출발을 하면 충분하다고 다른 사람들이 요리조리 방법을 가르쳐줘도 못하겠기에 그대로 탈락하고 말았다. 너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기억에 남아있는 탈락이었다. 백번 실수해도 실전에서 잘해야 한다는 그게 맞는 말임을 그때 깊이 느꼈다.

이제 인생에서 떨어지는 시험은 안 봐도 되고 더 이상 탈락이라고 쓰는 일은 없겠다 했는데 요즘에 새로운 떨어짐을 경험하고 있다. 시낭송의 매력에 빠져 시를 외우고 또 다른 참가자들과 대회에서 경합을 벌이면서 상을 받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한다. 열심히 시 한편을 외우고 나만의 느낌으로 해석하고 그 맛을 살려 낭송하는 것이 좋았는데 대회에 나가 실력을 가르는 평가를 받다보니 기쁨과 환희, 실망과 후회의 감정을 넘나들게 된다. 그러나 몇 번을 떨어져도 좋은 인생에서 만난 배움이 많은 시험이라 말하고 싶다. 두근두근 뛰는 가슴, 설레는 마음, 나이가 들면서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특별한 기분을 일상의 무대에서 경험하게 된다. 떨어지더라도 돌아보면 기분 좋은 인생의 추억이 된다면 기꺼이 만끽하여야 하지 않을까?

'떨어지다'는 돌이켜보면 나를 잘 이끌어준 가슴 아픈 훈장들이 아닐까 싶다. 탄탄대로, 초고속처럼 막힘없이 술술 풀리는 인생이었다면 팔딱팔딱, 콩닥콩닥 뛰는 심장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떨어지면서 돌아보고, 후회하고 결심하며 더 빛나는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다시 달릴 각오를 하는 것이다. 떨어져도 좋을 도전할 것이 많은 더 멋진 날들을 응원한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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