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보호수로 지정된 고목들과 서재대밭, 부사 선정비 등이 설창마을의 역사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yu@hanmail.net

조선 후기 설창장 서며 크게 번성
장 열리던 마을 안길에선 정월대보름 주민 줄다리기 장관

▲ 박창희 이장이 설창장이 열리던 마을 안길을 설명하고 있다.
14번 국도를 따라 김해시 진영읍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처음 만나는 설창(雪倉)마을.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리고, 1666년(현종 7년)에 세곡수납창고를 세운 곳이라 설창이라 불렸다. 면·리제 실시 이후 진영읍에 처음 생긴 중북면의 면소가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 설창장이 섰을 정도로 크고 중요한 마을이었다. 1914년 하계면, 중북면, 상북면 가동리 일부를 합하여 하계면이 될 때 면사무소도 이곳에 있었다. 현재 설창마을에는 100여 가구, 300여명이 살고 있다.
 
"마을 안길이 김해에서 진영으로 가던 길이었지요." 설창마을 박창희(53) 이장이 설창리 586번지를 기점으로 마을 안길에서 시장이 열렸다고 설명했다. "이 길에서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사람들과 친지들까지 모여 동편 서편으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했습니다. 대단한 광경이었죠. 지금은 줄다리기의 맥이 끊겨 아쉽습니다." 박 이장이 어렸을 적 줄다리기의 흥겨움을 회고했다.

학당 둘러싼 대나무숲 서재대밭
기근 구한 마을 수령 선정비
500살 넘은 시 보호수 팽나무 등 사라지고 흩어진 옛 흔적 곳곳에

▲ 마을 뒤쪽으로 서재대밭(대숲)이 남아있다.
길 따라 걸으면 서재대밭이 나타난다. 설창리 478번지에는 초가 목조 6칸의 학당이 있었다. 훗날 현 대창초등학교에 병합되었는데, 학당 주위에 대나무숲이 울창해 서재대밭으로 불렸다. 안길이 끝나는 지점에 약 300년 전에 세워진 송덕비가 있다. 극심한 가뭄으로 고을 전체가 기근이 들었을 때, 고을 수령인 박경지 부사가 양곡을 풀어 사람들을 구했다. 그 덕을 칭송하는 선정비는 시 보호수로 지정된 고목(팽나무)의 뿌리로 둘러싸여 있다. 지난 2003년 태풍 매미의 위력에 피해를 입어 지금은 나무의 전체 모습을 볼 수는 없다. 정상순(84) 씨는 "보호수로 지정할 때 이 나무가 300여년 되었다고 하는데, 뿌리 굵기를 봐도 500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설창마을에는 아름드리나무가 여럿 있다. 수령 250~280년이 넘는 팽나무와 느티나무들이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지는 곳에는 연못이 있었다. 마을 서쪽에 위치한 정병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주민들이 팠던 연못이었는데, 지금은 메워졌다.
 
"겨울에는 동네 아이들이 썰매를 타며 놀 정도로 큰 연못이었죠. 나무 한 그루를 타고 올라가서 다른 나무로 옮겨갈 만큼 나무도 울창했습니다." 이승조(60) 씨는 지금도 여름에는 정자나무(느티나무) 아래에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여름을 난다고 설명했다. 정자나무 아래에는 연자방앗간이 있었다. 숫돌은 정자나무 아래 있고, 암돌은 석축 아래 매장되어 있다.
 
▲ 부사 선정비.
정자나무에서는 14번 국도를 내달리는 차량들이 눈앞에서 보였다. 도로 건너편 음식점이 들어찬 곳도 설창마을이다. 도로 건너 김해 쪽으로 조금 가면 만나는 개울에는 삽다리가 있었다. 돌다리였던 삽다리의 다리돌은 대창초등학교의 표석으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교정에 남아 있어 옛 흔적을 볼 수 있다.
 
"소꼴 먹이러 간 동네 아이들이 개울에서 소라나 물고기를 건져 올렸죠. 물이 아주 맑았는데, 지금은 파이라." 마을 이장과 새마을 지도자를 지낸 이수한(75) 씨는 공장이 들어서고 도로가 넓어진 뒤로 변해버린 자연환경을 걱정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로 가에 위치한 집은 여름에도 창문을 열지 못한다. 자동차가 내는 소음도 만만치 않았다. 마을 뒤로 진영에서 부산 기장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생긴다는 말이 들려 마을이 온통 도로에 둘러싸이게 될지도 모른다며 마을 어른들은 걱정을 하고 있다.
 
설창마을은 지난 2001년 마을의 역사를 담은 책자 '설창'을 만들었다. 당시 진영라이온스클럽 회장으로 활동하던 이승조 씨가 마을이 더 변하기 전에, 마을의 유래와 유적과 옛이야기들을 모아 만들었다. 그 책자는 마을주민들은 물론 인근 마을과 출향인들에게도 소중한 추억이 되었으며, 지금은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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