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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있는 신사오늘의 수필
  • 수정 2019.07.23 18:14
  • 게재 2019.07.23 18:08
  • 호수 432
  • 11면
  • 이애순 수필가(report@gimhaenews.co.kr)
▲ 이애순 수필가

창호지 격자문으로 인테리어를 한 고급 한식당에서 창호지문의 아름다움을 본다. 창호지가 주는 아우라에 식당의 품격을 한 등급 올려본다. 음식 또한 과격하지 않고 정갈할 것 같다. 한식당의 격과 잘 어우러진다. 우리 것의 아름다움이 자꾸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다.

지금은 유리나 나무로 된 문을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내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집집마다 대부분 창호지로 방문을 발랐다. 창호지문에서 새어나오는 정감어린 불빛의 은근한 멋이 그립다.

소녀시절, 창호지문에서 받았던 작은 홀림이 지금도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밤이 되어 하나 둘 전등이 켜지면 창호지를 통해 낮고 고요한 불빛이 새어나온다. 불빛을 받은 창호지문은 방안의 일상을 밖으로 잔잔하게 드러낸다. 창호지를 통해 드러난 그림자의 조용한 일렁임을 보면 마음이 편안하다.

창호지를 바른 방문은 방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유리처럼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잘 걸러 비밀을 지켜 줄 것만 같다. 나쁜 일들은 감추고 따뜻한 이야기들만 전해줄 것 같은 다독임이 있다.

번잡했던 하루의 일상을 끝내고 돌아와 전등 아래 쉬는 사람들의 노고를 말없이 품어주고, 방안의 번잡한 일상들도 작은 일렁임으로 누추함을 숨겨준다. 방안의 성냄이나 분노와 같은 소요사태도 창호지 문을 통하고 나면 잔잔한 일렁임으로 포장된다. 창호지가 갖는 감춤의 미학이리라.

창호지를 바르는 데는 집에서 쑨 밀가루 물풀이 제격이다. 집에서 쑨 물풀은 창호지와 잘 어우러진다. 요즘의 딱풀이나 화학 풀로는 창호지가 잘 발려지지 않는다. 풀이 너무 강성을 띠어 창호지가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이리라.

창호지는 얇고 연약해 보이지만, 물풀을 먹여 젖어도 쉽게 찢어지지 않고 물풀의 습기를 받아들여 구겨진 부분도 쫙 펴진다. 잘못 붙여 떼었다 다시 붙여도 저항 없이 잘 떨어지고 다시 찰싹 붙는다. 사람의 마음까지 받아들이는 것 같다. 물풀은 창호지의 미세한 공간 깊숙이 스며들어 창호지와 하나가 된다. 그릇의 모양에 따라 형태를 바꾸는 물의 유연성을 닮았다. 창호지의 너그러움과 억지스럽지 않은 물풀의 유연성이 아마도 이런 궁합을 만들어낸 것이리라.

축축한 상태의 창호지 문은 햇볕에 말리면 찢어진다. 볕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이다. 창호지문은 응달에서 말려야 잘 마른다. 응달에서 마른 창호지는 마른 다음에야 짱짱한 햇살도 잘 받아들인다. 응달에서 오랜 시간 여유를 가지고 자연의 기운을 마셨기에 수용하는 힘이 생겼으리. 창호지의 겸손한 품성을 보는듯하다.

완성된 창호지 문은 햇살에 힘입어 더욱 그의 가치를 뽐낸다. 성깔을 부리던 사람들도 온화한 사람 앞에서는 누그러지는 것처럼 짱짱했던 햇살도 창호지를 통하고 나면 부드러운 성질로 바뀌어 방안에 은은함을 전한다.

유리문은 정갈하고 매끄럽다. 세련되고 깔끔해 도시적 멋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완벽하고 결연한 모습이다. 하지만 일체의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유리는 차갑다. 하얀 성에가 낀 유리창을 보면 스스로 제 성깔을 못 이겨 상처를 입는 사람이 연상된다. 햇빛마저 반사시켜 반사된 햇빛은 다른 것들까지 자연스런 흐름을 방해한다. 창호지 문은 암만 추운 겨울이라 해도 제 몸에 결로현상을 만들지 않는다. 바람과 소통하고 햇빛과 소통한 까닭이다. 저도 살고 남도 살리는 것이리.

니체는 미는 순간적 광휘가 아니라 나중에 나타나는 고요한 빛이라 하여 숨어있는 본질의 아름다움을 미의 가치로 보았다.

창호지는 멋을 안으로 보듬고 있다가 햇살이나 전등 빛을 받으면 본연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쏠듯이 발광하는 찬란한 형광 빛처럼 노골적이지 않다. 수용하고 발산하는 데 자신을 먼저 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드러낸다. 순간적 유혹이 아니라 가만히 보아야 아름답다. 이러한 창호지의 겸손한 품성은 산란한 마음을 어루만지는 힘이 있다.

창호지는 숨어있는 멋을 은은하게 드러내는 품격 있는 신사처럼 느껴진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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