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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예술적 빛깔’ 옻칠 문화, 가야로 계승 확인선주민의 옻칠 문화
  • 수정 2019.08.06 16:58
  • 게재 2019.08.06 16:49
  • 호수 433
  • 4면
  • 이제현 국립김해박물관 학예연구사(report@gimhaenews.co.kr)

■ 가야 선주민(先住民) 연구와 가야 문화 복원
가야사 연구가 한창이다. 가야사 연구 붐인 지금 시점에 우리는 가야 이전에 살던 사람들의 문화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가야 선주민과 가야는 따로 떼어놓고 다룰 수 있을까? 가야는 기원후 42년부터 562년까지 존속했다. 가야사 연구와 가야 문화 복원은 이 시기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나라가 그렇듯 건국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국가가 성립되기까지는 기반이 되는 문화가 있었고, 그 문화를 영위하던 사람들이 존재했다. 가야도 마찬가지이다.
김수로왕이 구지봉에 내려오기 전 가야지역은 구간이 다스리는 사회였다. 그들이 가야 건국의 주체가 되었고 가야 문화의 기반을 이루었다. 그런 점에서 가야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야 선주민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들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가야 건국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밝혀내는 것이 가야사 연구의 출발점이다.

▲ 가야 선주민의 무덤 구지봉 고인돌.

■ 옻칠
'가야 선주민 연구에서 웬 옻칠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차라리 가야 건국 이전 사회인 변한의 토기나 유리, 무덤 등을 다루어야 할 것 같다. 물론 가야 선주민 연구에서 옻칠 역시 하나의 소주제일 뿐이다. 다만 굳이 가야 선주민의 자취로 옻칠을 다루는 것은 삼한시대에는 철, 유리, 토기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 요소가 존재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또한 가야 선주민의 옻칠 문화는 우리가 잘 몰랐을 뿐이지 이 시기를 대표하는 하나의 문화였다.
그렇다면 옻칠은 무엇일까? 옻칠은 옻나무의 수액을 뜻하며, 그 수액을 특정한 물건에 바르는 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건 표면에 옻칠을 하면 얇은 고체 막이 형성되어 물건을 고급스럽게 하며 물건을 물과 부패, 열로부터 보호한다. 옻칠은 기능성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가장 오래된 천연 도료였다. 옻나무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까닭에 옻칠은 동양에서만 발달한 특유의 도장(塗裝)문화이다. 

▲ 칠기 제작 과정.

■ 우리나라 옻칠의 보고(寶庫), 창원 다호리유적
창원 다호리유적은 가야 선주민의 옻칠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이 유적은 기원전 2세기~기원후 2세기에 걸쳐 조성된 유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의 칠기(漆器)가 출토되었다. 또 본래 형태를 간직한 칠기도 다수 보존되어 칠기 제작방식과 재질 등을 확인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다호리유적 칠기는 대부분 나무 위에 그대로 검은색 옻칠을 하는 목심칠기(木心漆器)가 중심이다. 또 일부 삼각거치문(三角鋸齒文)과 같은 무늬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무늬가 없다. 칠기의 종류는 그릇류와 무기류, 농공구류, 생활용구 등 다양하다.
이러한 점은 평양지역에서 확인된 낙랑칠기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낙랑칠기의 경우 모시와 삼베로 기본 골격을 만든 협저 칠기가 많고, 직물의 울퉁불퉁한 면을 메우기 위해 두꺼운 바탕칠[下地]을 하는 특징이 있다. 칠기의 종류는 다양하나 중국 전국시대~한나라 칠기의 대표적 기종인 귀 달린 잔[漆耳杯]과 칠반[漆盤]의 수량이 많다. 또 붉은색, 황색, 녹색, 갈색, 청색 등으로 능형, 톱니, 물결, 구름무늬, 새, 짐승, 용, 괴인 등 다양한 무늬를 그렸다.
다호리유적 칠기와 낙랑 칠기는 제작 방식, 소재, 옻칠의 색과 문양 등에서 차이가 보인다. 이러한 점은 다호리 칠기가 중국 칠기의 영향이 아닌 독자적인 옻칠 문화로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까지 삼한시대 칠기 출토 유적은 전국적으로 확인되나 영남지역에 집중한다. 또 그 가운데서 중심지는 창원 다호리유적이다. 삼한시대 옻칠 문화는 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가야 선주민들이 발달시킨 문화였다.

▲ 칠기 제작 과정.

■ 삼한시대 칠기의 제작과 유통
다호리유적 칠기에서 주목되는 유물은 칠초동검과 칠초철검이다. 동검과 철검, 나무 칼집에 옻칠을 한 이 유물은 당시의 청동과 철 제조 기술, 목제 가공 기술, 옻칠 기술이 모두 접목된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물건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유물의 외형적 형태와 비율 등은 거의 일정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 이는 칠초가 단순 모방이나 기술 이전이 아닌 분업화된 장인 집단과 수준 높은 기술을 보유한 집단에서 제작하여 보급되었을 가능성을 알려준다. 그리고 삼한시대 칠기 제작과 유통의 중심지는 칠기의 수량이나 기종의 다양성, 수준 높은 제작 기술에서 창원 다호리유적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무관심했던 옻칠이지만 가야 선주민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옻칠 문화를 화려하게 꽃 피우고 있었다.

▲ 다호리유적 출토 칠초동검과 칠초철검.

■ 가야 선주민 옻칠 문화의 가치와 의미
옻칠은 옻나무 한 그루에서 150~200g 정도밖에 채취할 수 없는 희소성이 높은 도료였다. 따라서 누구나 원한다고 옻칠을 할 수도 없고 옻칠 물건을 가질 수도 없었다. 선사시대부터 옻칠은 고귀하고 특수한 물건에 칠해진 고급도료였고 높은 신분의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수천 년 동안 우리가 옻칠을 사용할 수 있도록 옻나무가 우리나라에서 재배될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고대의 옻칠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조선시대 화려한 나전칠기를 꽃 피우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가야 선주민의 자취인 창원 다호리유적이 있었다. 가야 선주민은 우리가 몰랐던 아름답고 예술적인 옻칠 문화를 이룩했다. 그리고 그 문화는 이후 가야로 계승되었다. 우리가 밝혀나가야 할 가야 문화 복원이 바로 그동안 잊혀졌던 혹은 무관심했던 분야는 아닐까 생각된다. 가야 선주민의 옻칠 문화처럼 지금도 밝혀져야 할 가야의 새로운 면이 가야 문화 복원 사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가야 선주민의 옻칠 문화는 국립김해박물관 특별전 '고대의 빛깔, 옻칠' 전시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많은 관심을 바란다.

 


이 제 현
국립김해박물관 학예연구사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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