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희 김해수필협회 회장

한 해가 끝나간다. 아쉬움에 떨고 있는 마지막 달력마저 스산하다. 그 또한 며칠이 지나면 새 달력으로 바뀌게 된다. 되돌아보니 낡은 달력이 붙어있던 추억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낯익은 눈빛과 웃음이 깔린 모퉁이마다 반가운 소식과 슬픈 소식이 머물고 있다. 세월이 그리움이 되어 여울로 흐르고 있다.

나뭇가지에는 몇 알의 홍시가 매달려 있다. 인심 좋은 주인의 배려가 까치밥으로 남아 간밤에 얼었다가 햇살이 퍼지면 녹기를 반복한다. 12월의 언저리가 거리에 나부낀다. 아직 늦가을의 기억이 멀어지지도 않았는데 들녘은 허허로움으로 가득 찬다. 사람과 자연이 같다고 하지만 자연을 앞지르지는 못한다. 겨울이 되면 사람은 옷을 점점 두껍게 입지만 자연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차이이다.

계절이 두고 간 시간은 길지 않다. 길게 느껴지는 겨울도 완행열차의 간이역처럼 후딱 가버린다. 나 또한 일 년 내내 바쁜 나날을 보내다 겨울이 되면 동면을 한다. 유일하게 조직과 일에 벗어날 수 있는 계절이 1월과 8월이다. 8월은 그다지 나의 성에 차지도 않는다. 더위에 짓눌려 계절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1월은 단 1분도 양보할 수 없이 나의 계절로 묶어 둔다. 언제나 1월이 되기도 전에 나는 1월을 준비한다. 볶은 커피와 땅콩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시장을 가기도 하고, 책을 구매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보기도 한다.

몇 년 전 겨울, 교통사고로 일주일 정도 입원을 했다.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창가에 기대어 온종일 책을 읽었다. 그때 읽으면서 붙인 포스트지가 너덜거리는 신영복의, 감옥으로 부터 사색, 을 또 뒤적거린다. 저자의 깊은 사유와 맑은 영혼을 다듬은 문장이 독자인 나에게 큰 거울이 되었다. 세평 남짓한 방안에 내가 움직이는 것은 고작 식사 시간과 차 마시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제외하고는 은둔하며 보내는 수행자처럼 방안에 들어앉아 꼼짝 않는다.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스스로 택한 혼자만의 방안에 햇살이 온종일 기웃거린다. 때로는 북쪽으로부터 하얀 싸락눈이 반갑게 내린다. 

혼자 있는 시간은 내게 자양분이다. 사유가 있고 성찰이 있다. 외로움 속에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다. 그렇다고 미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오지 않은 희망을 담은 미래를 꿈꾸어보는 것도 홀로 있게 된 시간 덕분이다.

해가 질 무렵이면 스산해지면서 정적이 한순간에 몰려온다. 여백을 헤아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조급한 마음이 사라진다. 상대에 대한 마음도 헤아려지는 횟수가 늘어난다.

온 세상이 어둠 속으로 다가서면 나는 소나무처럼 적막을 잘 이겨내는 마음이 생긴다. 어둠 속의 소나무는 한결 묵직하다. 외로운 영혼들에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주고 상처 입은 자들에게 마음을 열어놓는 큰 그늘이 된다. 소나무뿐만 아니라 어둠 속의 사물은 엄숙하다. 

젊은 날은 고독과 친숙해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까이 지내는 어느 문인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친구를 만들기보다 자연과 친화력을 가지는 일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고 했다. 젊어서는 그 뜻을 몰랐지만, 이제는 절실하게 공감하고 있다.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시간이다. 홀로 있는 자만이 냉철하게 삶을 관조하면서 마음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텅 빈 충만감이다. 고독의 감정은 외로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슬픔이다. 고독을 불러들이는 것은 즐거운 일이고 고요에 점령할수록 오히려 기쁨이 된다. 슬픔이 커질 때마다 슬픔의 마디가 깎여져 나가니까. 오랫동안 아픈 상처를 이겨내는 것은 단단한 삶을 북돋우는 행위다. 혼자 견디는 사람이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 된다. 공허한 느낌이 들수록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계절의 모퉁이에 간절한 사연이 고여 있다. 잊히지 않은 그리움의 이야기가 뒹굴고 흠결의 틈 사이를 끝내 메울 수 없는 인연의 그림자들이 차갑게 나돈다. 오랜 고독을 이겨내는 자는 한층 더 의연해진다. 오늘도 혼자 앉는다. 겨울은 고독을 황홀하게 즐기는 계절이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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