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토였다 소련에 편입된
사할린 남쪽 가라후토 지역
일본인·조선인 주체적 삶 그려
특정 국가에 귀속되지 않는
다문화적 정체성 구축한 존재
그들의 역경 이겨낸 용기 감동



일본, 한국, 러시아 세 나라의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지마와 이라의 멘탈리티에는 경계가 없다. 그들은 언젠가는 일본이나 한국에서 생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사할린 잔류자에 대한 일본과 한국의 귀국 정책 차이 때문에 사할린의 일본인과 한국인 가족이 러시아, 일본, 한국에 흩어져 살게 되는 것도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다.(책 170쪽)

'가라후토'라고 불리던 사할린 남쪽 지역은 한때 일본 통치 하에 있었고 1945년 일본의 패전 후에는 소련의 영토로 편입된 곳으로 제국주의가 각축을 벌였던 곳이다. 일본 통치 시기에는 본국의 자원 근거지 역할을 맡은 이 지역에 많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이주해 생활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그들 대다수는 각국의 안일한 태도와 이해관계 등의 문제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사할린 '잔류자'가 됐다.

당시 사할린에 잔류했던 사람들과 그들이 이룬 가족은 세대를 이어가며 국가라는 개념에 귀속되지 않는 그들만의 삶의 방식을 개척해 나갔다. 사할린, 일본, 한국 그 어디에서도 외지인이나 이방인으로 취급당했던 그들의 삶은 분명 비극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특정 국가에 귀속되지 않는 주체적 삶의 궤적을 그려나갈 수 있었다.

이 책 <사할린 잔류자들>은 그들이 개척해 나간 '삶'에 주목한다. 그들을 국가에 의해 희생당한 비운의 존재로 역사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열어간 '트랜스내셔널'한 생활 방식의 실천의 가능성과 창조성을 들여다본다. 전후부터 현재까지 사할린 잔류자들과 그 가족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다민족·다문화적 존재로서 다층적 정체성이 혼재된 세계를 구축해온 그들의 면모를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1부 '가족과 살다'에서는 1990년대 이후 영주 귀국을 통해 자식 및 손주 세대를 동반하거나 초청하여 일본에 정착한 사람들을 그린다. 2부 '국경을 넘다'는 부부만 영구 귀국했지만 사할린이나 한국에 있는 가족과 왕래함으로써 트랜스내셔널한 생활 공간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3부 '사할린에서 살다'는 일본이나 한국으로 영주 귀국하지 않고 사할린에서의 생활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편 책의 뒷부분에는 사할린과 가라후토의 지정학적 상황을 말해주는 '해설'을 덧붙였다. 사할린에서 벌어졌던 일본 통치 시대의 정책이나 조선인 이입, 패전 직전의 혼란과 귀환, 전후 조선인 사회로의 편입과 영주 귀국 등을 살펴본다. 이로써 사할린 근현대사를 사할린 잔류 '일본인'을 중심으로 되돌아보고 있다.

책에 실린 사할린 잔류자들 열 가족의 사연을 읽어가다 보면,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들의 삶을 소중히 지켜나가는 이들의 슬픔과 용기에 공감하고 감동하게 된다. 또한 단일민족이나 단일국가 관념에서 탈피해 점점 세계화되어 가는 오늘의 글로벌시대에, 국가라는 단일 정체성에만 갇혀 사고하고 생활하는 폐쇄적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요구받게 된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긴장 완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지향하는 우리로서는 남북한 관계는 물론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한반도 관련 국가들과도 평화와 공생의 삶을 실현할 수 있는 다원적 상생 외교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관점을 책은 제시하는 것 같다.

부산일보=백태현 선임기자 hy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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