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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할머니오늘의 수필
  • 수정 2019.09.04 09:17
  • 게재 2019.09.04 09:10
  • 호수 437
  • 4면
  • 성혜경 김해수필 사무국장(report@gimhaenews.co.kr)
▲ 성혜경 김해수필 사무국장

노인은 한눈에 봐도 연로하고 병색이 짙었다. 굽은 등에 팔다리를 약간 벌려 걷는 모습이 커다란 거미 같았다. 파마기 없어진 짧은 머리카락은 끄트머리만 까맸고 뒤통수가 눌린 것으로 보아 자주 누워 있는가 싶었다.

길에서 만나면 허리 굽히는 정도로 어른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땅을 보고 걷던 노인은 굽은 허리를 힘겹게 펴서 나를 올려보곤 했다. 희미해진 눈썹 문신이 그늘이 드리웠고 회백색 눈이 나를 응시하면 섬뜩했다.

거미할머니가 기운이 나면 마실 나오는 날이다. 늦은 밤에도 다닐 때가 있다. 차가 다니는 어둑한 골목에서 비척거리다 몸이 한쪽으로 쏠리면 간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동네 노인이라 여기고 지나치면 그만이지만 아슬아슬한 거동이 늘 신경 쓰였다.

몽총한 노인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치는 걸 본 적이 있다. 집 근처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올망졸망 줄 서서 나오자 할머니는 가던 길을 멈추어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초라해 보이는 노인도 누군가의 젊은 어머니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거미 할머니가 우리 빌라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이제 막 올라오는 풀을 뽑고 있었다.

"할머니, 뭐 하세요."

뻔히 보면서 딱히 할 말이 없어 던진 말이었다. 처음으로 노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여그 지심 봐라이."

익숙한 말이다. 밭에 풀이 뽑아내는 것을 '지심맨다'라고 하는데 김을 맨다는 방언이다. 그러고 보니 시멘트 길 틈새에도 잡초가 자라기 마련인데 집 근처에는 풀이 없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우리 동네는 드문드문 밭이 있었다. 어디엔가 노인이 농사를 짓던 밭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집이 들어서면서 일터를 잃은 할머니가 습관처럼 김을 매듯 동네 잡초를 뽑는다는 있을 법한 상상을 했다. 할머니의 무료한 시간은 동네 풀을 뽑는 것으로 메워나가는 듯했다.

언제부턴가 거미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이름과 나이도 모를뿐더러 집도 모르니 안부는 알 길이 없다. 진작 자녀는 종종 찾아오는지, 돌봐주는 사람이 있는지. 집이 어디냐고도 물어봤어야 했다.

친정어머니에게 이야기를 전했더니 오래 사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도 '늙으면 자는 잠에 가야 좋다.'라고 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지만 노인에게는 큰 과제인 것 같았다.

노인들이 살기 어려운 세태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노인들은 취미 생활을 하거나 여행을 다니며 여유를 누리지만 빈곤층의 노인들은 돈이 있어야 자식들이 자주 찾아온다는 서글픈 자책을 한다. 노인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외로움이 아닐까.

노부모들이 예전처럼 손자 재롱을 받는 일은 드물다. 직장 다니는 자식들을 위해 육아를 떠맡은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다. 육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건강이 나빠지면 요양원에 간다고 한다.

나는 베이비붐 세대 막내이다. 세대 간 격차가 벌어져 서러운 노인을 이해할 수 있고, 자식을 안고 노인 다섯을 업은 청년의 미래도 안타깝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제 노인을 우대하는 일을 정부 정책에만 있다. 옆 돌아보기도 바쁜 세상이다. 거미 할머니가 힘겹게 바람 쐬러 나와도 아는 척하는 이가 없었다.

직장을 다녀본 사람들은 월요병을 앓아봤을 것이다. 단꿈 같은 주말을 보내고 호랑이처럼 떡 버틴 월요일 아침의 힘겨움. 노인들도 그러한 날들을 이겨내고 자식을 키웠을 것이다. 거미 할머니는 외로울 때마다 밭매던 농경 시절이 그리운지도 모른다. 어느 세대이건 자식을 낳고 키우느라 최선을 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농사를 짓건 사무실로 출근을 하건 성실한 정성이 있어야 한다.

바람 쐬기 딱 좋은 날씨이다. 지금이라도 골목에 거미 할머니가 나타난다면, 한달음에 뛰어 내려가겠다. 내가 먼저 허리 굽혀서 곰살맞게 안부를 물어야겠다. 미리 박하사탕 항 봉지라도 사둬야 하나.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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