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모영 김해문인협회 회원

결코 끝나지 않을듯하던 한더위도 처서를 지나며 고개가 꺾였다. 여름햇살과 비에 무성하게 어우러져 있는 화초들 속에서 코끝을 스치는 기분 좋은 향이 보인다. 어딘가 싶어 고개 숙이니 뜻밖에도 난이 꽃대를 네 개나 피워 올렸다. 정갈하지 않은 베란다에 방치하듯 내어둔 화분인데도 장하기만 하다. '미진(微塵)도 가까이 하지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는 가람 이병기 선생님의 시조구절이 떠올라 오히려 난에게 미안하다.

이십년 전쯤이다. 진영에서 버스를 타고 사군자를 배우러 오시던 일흔 초입의 어머니들이 있었다. 먹을 갈아 하얀 화선지에 난을 치면서 도란도란 나누던 이야기가 늘 잊혀 지지 않는다.

"우리 집에 난(蘭) 꽃이 피었는데 차 한 잔 하러 와"

그날 그 난꽃은 화선지 먹물로도 피어오르고 내 마음에서도 새록새록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이십년이 지났어도 난꽃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다. 나도 다음에 저분들처럼 노년을 만들어가고 싶다고 여기던 바램은 갈수록 짙어진다.

베란다의 난 화분을 거실로 들였다. 차 한 잔 나누자고 친구를 불러야 하는데 아직 그럴 마음의 여유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들에게 난 향을 자랑하며 '난 꽃이 피었는데 맥주나 한잔 하자'고 했다. 밖에 있던 아들이 들뜬 엄마의 전화를 받고 곧장 맥주를 사들고 왔다. 가만가만 퍼지는 향을 음미하며 아들과 그 때의 할머니들 이야기로 맥주잔을 기울인다.

난꽃을 곁에 둔 술상은 소박해도 향기롭다. 늘 바쁘기만 해 보이는 엄마가 난향에 푹 빠져있는 모습이 오히려 멋지다고 감탄한다.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아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밤은 깊어지고 난향은 짙어지고 모자의 정은 두터워진다. 이만한 주빈의 자리가 어디 있으랴. 최고의 마무리 사는 역시 '난 꽃이 피었는데 맥주 한잔 하자'였다.

여름 내내 열어 둔 창문을 닫았다. 아침저녁 서늘해진 기온 탓도 있지만 모처럼 핀 향기를 머물게 하고 싶었다. 거실가득 은은한 향이 온 몸을 감싼다. 옛 어른들이 난 화분 하나만을 가지고 안분지족하던 마음을 헤아리겠다. 꽃 대 하나만으로도 향을 즐기고 남음이 있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일을 하다가 문득 꽃을 바라보는 기쁨이 여간하지 않다. 마음을 씻어주고 눈을 맑혀주고 일상에 찌든 나를 정화시켜준다.

난 꽃에는 그윽함이 있다. 난처럼 누군가에게 향기로운 사람이면 좋겠다. 난향백리 묵향천리 인향만리라고 했다. 너무 진하지도 않고 은은한 사람으로 익어가고 싶다. 내 나이 칠십에도 "우리 집에 난이 꽃 피웠는데 차 한 잔 하러 와" 라며 친구를 초청하는 그림이 그려진다. 차 한 잔에 난 꽃 화분 하나면 친구를 초대하기에 충분할거야. 오래도록 이야기 나누어도 지치지 않고 기쁘기만 할 거야. 누구를 먼저 초대하지.

오늘만큼은 나 혼자 암향부동(暗香浮動)을 즐겨야겠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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